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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합작

[형규양하] 비가 그쳤고 내 사랑도 멈췄다

양하른 합작 'in bloom'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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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님“


 적막이 흐르던 사무실에는 양하의 높낮이가 거의 없는 소리마저도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울림이 만들어 낸 공기의 흐름은 순식간에 사무실의 흐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옷걸이에 걸린 제 겉옷을 꺼내는 형규의 덤덤한 손길이 멈칫 하는것을 양하는 알 리 없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양하와 눈을 맞추던 형규의 손끝은 분명 잘게 떨리고 있었다.

 왜, 라는 물음이 필요치 않았다. 이미 허공에 맞물린 두 사람의 눈빛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만큼이나 많은 말이 오고 갔다. 또 다시 말소리가 사라진 사무실에 시끄럽기까지한 빗소리로 가득 메워질 때 쯤, 양하의 입술이 또 한 번 열렸다.


 “우산… 있어요?“









 “아흑…, 흐..읏.., 좀 천, 천히“

 “시, 끄러워, 요.. 후…“


 양하의 버클을 풀어 바짓단을 끌어내리는 형규의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제 집 거실 보다도 한참 큰 호텔방의 화려함에 한번쯤 놀랄법도 하건만, 형규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제 앞에 놓여진 양하의 몸을 탐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물론 그것은 양하도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라고 말하는 그 입매는 묘하게 그 끝이 올라가 있었으니까. 

 사무실 밖 이형규 변호사는 이런 모습이구나. 두 사람의 몸이 함께 움직이는대로 제 모양을 바꾸어대는 라텍스 소재의 매트리스 위에 누운 양하는 제 위에서 두 개의 불기둥을 큰 손으로 감싸 쥐는 형규를 바라보던 양하는 조금 전까지도 뜻 모를 얼굴을 하고서도 저와 함께 서류를 검토하고 의견을 나누던 이형규 변호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음이 감동으로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살짝 날카로운 목소리와는 별개로 제 몸 이곳 저곳에 잇자국을 내는 형규의 숨결은 뜨거웠고, 어딘지 모르게 서툰 그 손길은 발끝이 저릿할만큼 짜릿해서 양하는 신음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자꾸만 미소를 흘렸다. 뭐가 급하다고 그러세요, 이형규 변호사님. 입 안 가득 파고드는 형규의 혀 끝을 느릿하게 감아 올리던 양하의 조용하지만 야릇한 유혹에 형규의 손길이 보란듯이 빨라졌다. 흐응, 아앗..! 야살스럽게 뱉어진 양하의 신음은 눈꼬리에 방울방울 눈물까지 매단 채 였지만 어쩐지 그 조차 양하의 게임에 넘어간 듯한 형규는 웃지 못했다. 여전히 밖에는 폭포수같은 빗소리가 한창이었다.


 .
 .

 “이형규 변호사님?“


 홧김에 준영의 로펌을 뛰쳐 나와 제 사무실의 반도 안되는 곳으로 도망치듯 옮겨 간 직후였다. 앳되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말투에선 계산이 여실히 느껴지던 양하의 얼굴을 형규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집 외동아들. 입양 된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어찌됐건 그룹의 후계자로 점 찍어둔 귀한 아들이라는 것쯤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양하가 비서도 대동하지 않은 채 제 사무실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형규는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시켜 예의 사무적인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윤양하 씨가 여긴 어쩐 일이시냐는 그 물음에,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보이던 양하의 그것은 분명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쥔 어린 아이의 모양새였다. 그 비웃음과도 같은 행동에 형규 또한 악수를 청하던 손을 거뒀다. 


 “아시면서요 뭘. 제가 왜 왔는지“

 “아. 제가 될 거란 생각은 미처 못해서요. 더군다나 이렇게 만나리라곤“


 그래, 사실 묻지 않아도 뻔한 질문이었다. 이 바닥이란 보이는 것과는 달리 꽤 좁았고, 소문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윤양하가 아버지 몰래 자신의 세력으로 키워 오던 사업에 차질이 생겼고, 양하의 아버지는 그에 도움이 아닌 맞대응을 택했다. 그 누구도 섣불리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제 배 아파 낳은 자식과 데려온 자식은, 이런 순간에 차이나는 법이라고. 윤양하는 여전히 그 큰 그룹의 후계자로 지목 되었지만 그것은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외려 그의 아버지 옆에 선임 된 송준영 변호사를 아버지는 더욱 믿는 듯 했다. 

 양하는 보란듯이 제 쪽 변호사로 형규를 택했다.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송준영 변호사를 발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란 뒷조사가 가져다 준 결과였지만 형규를 처음 만나던 그 순간 양하는 직감했다. 아버지와의 싸움보다 조금은 더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으리란 걸.





-




 “자주 뵙네요. 직접 오실 줄은 몰랐는데“

 “자주 만나야죠. 우리 일인데“

 “저, 윤양하 ㅆ…,“

 “초밥, 좋아하세요? 도시락도 맛있긴 한데 영 물려서요. 음, 싫어하셔도 드세요 제가 사온거니까“


 처음 한 두번이야 소송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차원에서 당연히 만나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를 빙자한 양하와의 만남이 꽤 자주, 여러 차례 이어지자 형규의 시선 역시 그 깊이를 더해갔다. 게다가 만나는 장소도 다양했다. 사무실로 오시죠, 라는 형규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 채 카페나 레스토랑으로 무작정 약속 장소를 정해버리는 양하였다. 


 “사무실에만 있기 답답하잖아요. 변호사님도 저도 책상이라면 지긋지긋할만큼 봐왔을텐데"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한적도 없지만, 이런 곳 보다는 나은것 같네요. 사람 많은건 별로 안 좋아해서 말입니다“

 “아…, 우리 변호사님 조용한거 좋아하시는 구나“

 “큼, 일하죠“

 “…. 그럼 다음번엔, 호텔로 잡을까요?“


 상대편에게서 입수 된 새로운 정보에 대해 간단히 브리핑을 하려던 형규의 입술이 길게 다물어졌다. 모든 세상이 일시정지를 눌러 놓은 것 마냥 조용하던 그 때, 오롯이 두 사람의 시선만이 얽혔다. 농담처럼 툭 던진 새털같이 가벼운 양하의 입꼬리도 한 순간에 고요하게 자리를 잡았다. 답지 않게 살짝 붉어진 귓볼만이 지금 양하가 무척이나 떨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멍하게 자신을 응시하던 형규에게서는 점차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눈동자처럼 자신감이 가득 찬 양하 역시 그 숨막히는 침묵에 조급함을 숨기지 못하던 그제야 형규의 입술이 조금씩 열렸다. 윤양하 씨, 나 좋아합니까. 분명 질문이었으나 말끝은 마침표와도 같은 낮은 어조에 저도 모를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양하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네. 저 변호사님 좋아합니다. 끌려요. 표정을 보아하니 변호사님도 그러신 것 같ㄴ…“


 뺏긴 사탕을 되찾으려는 아이처럼 형규가 급히 양하의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물었다. 내 말이 맞죠. 반문하는 대신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양하의 혀를 형규는 무겁게 짓눌렀다. 대체 넌 뭐가 이렇게 당당해. 울뚝 솟은 형규의 열등감이 혀끝을 지배했다. 아찔한 줄타기같은, 두 사람의 첫키스였다.




-






 “똑똑-“

 “아, 안녕하세…,“

 “매일 보는 사이에 인사는 무슨. 변호사님은?“

 “아 저…,“


 홀로 사무실을 지키던 혜주는 양하의 등장에 안절부절 손톱을 매만졌다. 아니나 다를까 재판을 마치고 돌아오던 형규가 양하를 발견하자 표정이 굳었다. 아, 저…, 말릴 새도 없이…, 우물쭈물 변명거리를 늘어놓던 혜주를 형규가 가볍게 제지했다. 됐으니까 선혜주 씨는 이만 퇴근해요.


 “나 오늘은 같이 일하러 온 거에요“

 “…., 그러죠 “

 “눈 좀 마주쳐 줘요. 키스도 한 사이에“

 “윤양하 씨“


 발끈하는 형규의 목소리에 양하가 결국 아이처럼 실소를 터트렸다. 당황하는 것 보니 변호사님 귀여운 구석도 있으시네. 필터링이 전혀 없는 직설적인 말투에 또 한 번 매서운 눈빛이 마주치고 나서야 양하는 가볍게 손을 들어 졌다는 제스츄어를 보냈다. 일 해야죠, 일. 빼곡한 서류 뭉치로 눈을 돌리면서도 쿡쿡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런 양하를 흘끔 바라보던 형규의 시선이 꽤 오래도록 그렇게 머물렀다. 마치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처럼, 그렇게.




-




 굳이 사춘기라고 명명하지 않았어도 꽤 오래 전부터, 형규는 제 취향이 남과 다른 것을 알고 있었다. 동생들 중에서도 유독 여자인 진애보다 남동생인 형순이 귀여웠던 것은 비단 차별대우의 컴플렉스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밝힐 수도 없었고 밝혀서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날 때부터 형규를 무겁게 짓누르는 장남의 위치가 그러했고 저만을 바라보며 아침마다 손수건을 다려주시는 어머니의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내 인생이라며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왼쪽 다리에 짙게 남겨진 화상 흉터와도 같은 가족이, 형규에게는 늘 버거움의 대상이었으니까.


 “으음…,“


 어느새 제 집인냥 쇼파에서 곤히 잠든 양하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던 형규의 손가락이 가만가만 그의 입술께를 간질였다. 요 붉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다 너무도 자극적이어서. 형규는 제 자신을 숨길 수 없었던 그 날의 키스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양하의 고백은 돌아갈 곳도 없이 너무도 직구여서 형규는 뱃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뜨거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재벌 집 양아들 쯤 되면 모든게 이렇게 쉬운건가. 


 “..으음…, 변호사님…?“


 아니, 모든게 쉽지 않은 것은 양하 역시 마찬가지임을 형규는 알고 있었다. 치열하게 준비하는 이번 소송이 그랬다. 아버지와의 정면돌파. 그 속에는 그룹의 후계자가 아니라 아들로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당신도 나처럼 가족이 아프구나. 소송이 진행되는 내내 양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었으리라.

 잠이 덜 깬 양하의 촉촉한 눈동자가 궁금증을 가득 안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하라는 무언의 재촉. 마음에 수북히 쌓인 그 벽들 사이로 이미 수백번은 더 양하에게 입을 맞추고 그를 안고 그를 가졌지만 형규는 이번에도 쉽사리 그 벽을 뚫지 못했다. 결국, 또 그의 옷자락을 먼저 움켜 쥔 것은 양하였다. 변호사님,

 “우산…, 있어요?“

 .
 .

 “으윽.., 아.., 씨바…ㄹ…,!“

 “아읏..!, 앗..! 혀, 형규씨..!“


 형규의 뜨거움이 양하의 안에서 퍼져 나갔고 양하의 것 또한 형규의 손 안에 가득했다. 이리저리 흩어진 매트리스만큼이나 꼭 붙어버린 두 사람의 호흡 또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쉬이 가시지 않는 여운에 양하가 먼저 허리를 움찔거리자 투박하지만 세심한 손길로 뒷처리를 해주는 형규였다. 조금만 더. 라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순간이 전부인 둘에게는 사치스러운 단어였다. 

 마치 이 호텔 방에 들어오기 전처럼 똑같은 매무새를 한 형규는 또다시 아무런 감정을 얼굴에 담지 않았지만 그의 손끝에서 꼼꼼히 여며지는 양하의 이불은 한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저 보쌈 해 가시려고요? 형규의 행동 하나 하나를 눈에 담던, 아직도 이불 밑으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양하가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겉옷까지 완벽하게 챙겨 입은 형규는 진동이 울리던 휴대폰 액정을 보며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예 어머니, 지금 가요. 꽤나 다정한 그 말투에 양하는 금세 씁쓸함을 입에 올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갈 심산인지 여지껏 눈 한 번을 마주쳐주지 않던 형규는 마지막 문 앞에서 잠시 주춤했다. 도록도록 눈동자만 굴려 형규의 움직임을 쫓던 양하 역시 멈칫.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 하는 기대가 우습게도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그 때, 조금 떨림이 있는 형규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우산은,


 “우산은, 두고 가죠“


 아마도 밤 새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승패만이 전부인 소송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양하와 형규의 승리였다. 여전히 그의 아버지는 양하를 전부 믿으시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늘 탐탁치 않았던 그 한 조각이 이제는 충분히 당신을 밟고 올라 설 수 있는 인재라는 것을 염두에 두신 눈치였다. 재판장에서 만난 양하는 조금 더 성숙해져 있었고, 또 그만큼 더 매력적이어졌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변호사님도 수고 하셨어요 “

 “아. 아닙니다 “


 어색하게 맞잡은 두 사람의 악수는 채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워보일까 전 날밤부터 고민한 흔적들이 무색해질만큼 양하는 말끔해보였다. 결국 형규도 두 사람이 만난 첫 날 처럼, 영업용 미소로 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날 이후, 누구도 먼저 나서서 서로를 찾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같이 드나들던 양하의 발길이 뚝 끊기자 아무것도 모르는 비서 혜주만이 양하의 소재를 물었다. 그 분 요즘 안오시네요? 정말 궁금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그녀의 물음에 형규는 괜한 헛기침을 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문 쪽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는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그쳤으니까요“

 “네?“


 도통 무슨 영문인지 알아 듣지 못한 혜주를 두고 형규는 가만히 제 앞에 텅 빈 쇼파를 바라 보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튀어 나오는 윤양하의 잔상이 이번에는 말간 눈을 하고 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떤 날은 잠을 잤고, 어떤 날은 손가락 사이에 작은 커피잔을 끼워 호로록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형규는 그럴때마다 세찬 도리질을 했다. 흩날리는 먼지 속에 부디 윤양하의 모습도 훨훨 털어지길 기대하면서.




-




 “아이구. 우리 변호사 아드님 있으니 이런 고기도 다 먹어보고“

 “많이 드세요“


 재벌 집 도련님을 의뢰인으로 둔 댓가는 실로 엄청났다. 어머니의 반찬 가게 하나 정도는 거뜬히 처리하고도 남을만큼이었지만 형규는 어쩐지 통장에 찍힌 액수를 한참이고 보고만 있었다. 무수히 많은 숫자들이 새겨진 그 사이로 자꾸만 양하의 얼굴이 겹쳤다. 그리고 이것이 윤양하와 이형규의 거리라는 것 또한 여실히 느끼고 마음에, 또 머리에 꼭꼭 새겨 넣었다. 그래야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고기 몇 점에 술까지 하신 어머니는 자랑스러운 큰 아들 덕에 이런 호사를 누리신다며 저녁 내내 웃으셨다. 어머니의 한 번 오른 흥은 가족들을 덩달아 웃게 했고 또 맏아들 자랑이라며 입술을 비죽이던 동생들 마저도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묵묵히 고기를 구워대던 형규도 편한 차림만큼이나 아무 생각 없이 그 속에 녹아 들었다. 내 자리. 형규는 그 세 음절을 꽤나 자주 읊조렸다.




-



 “변호사님,“

 “…., 이젠 동네에서도 헛 게 보이네…“


 옷에 짙게 배인 고기 냄새를 뺀다는 핑계를 삼아 늦은 밤 동네를 돌던 중이었다. 하도 들어서 어쩌면 따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던 그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아스라히 사라지는 꿈 같은 인영을 지독한 일상이 반복되는 이 곳에서까지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눈 한 번 질끈 감고 나면 사라지겠지. 


 “…. 변호사님?“

 “…..“

 “ 이형규 씨,“

 “…., 윤, 양하?“

 타이에 셔츠만 잘 어울리는 줄 알았더니, 이런 차림도 꽤 괜찮네요. 늘 언제나처럼 예쁘게 웃는 양하의 한 손에는 커다란 과일 바구니가, 그리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다.





-




 “수고하셨어요“

 “이미 충분히 들었습니다. 통장에 찍힌 숫자로도 확인했고“


 챙, 하고 가볍게 부딪히다 떨어지는 술잔의 부딪힘에 찰랑이는 소리가 더해졌다. 더는 붙일 말이 없어 건넨 인사에 또박또박 앞 뒤를 따지는 형규를 보며 양하는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이렇게 무뚝뚝한 사람이 뭐가 좋다는 건지 제 자신도 알 수가 없어 빤히 쳐다만 보자 시선을 느낀 형규가 괜히 턱으로 발 밑에 놓여진 것을 툭 건드렸다. 이건 뭡니까.


 “아… 혹시 누구라도 마주치게 되면 이런거 건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서민 생활 같은거, 드라마 보고 배워요?“

 “하하. 그러게요. 이것 보단 한우 세트가 낫다는 걸 몰랐어요“


 흘리듯 지나간 한 마디에 다시 술 잔으로 가려던 형규의 손이 멈췄다. 아. 제가 말하고도 이상함을 몰라 물음표를 잔뜩 띄우던 양하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보려던 건 아니고, 평상에 다들 모여 계시길래요.


 “가족들이 다 있는 그런 모습 보니까“

 “….“

 “변호사님의 뒷모습이 이해가 되네요“


 마치 퍼즐 조각의 귀퉁이처럼, 빠져서는 절대 완성 시키지 못할 그림 같았어요. 그제야 이해가 되더라고요. 왜, 시도 조차 못했어야 했는지. 왜, 계속 도망쳐야 하는 사람 같았는지. 거기 있어야 하는 사람이구나, 변호사님은. 내내 그렇게 있어야 했던 사람이겠구나, 했어요. 


 “윤양하 씨도 그래야 하는 사람이잖아요“


 우리는 어차피, 다 제자리로 돌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무미건조한 말이었지만 작은 술잔을 쥔 형규의 손이 아무도 모르게 파르르 떨려왔다.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함께이고 싶었다. 꽁꽁 숨겨 둔 마음이 자꾸만 때를 모르고 비집고 흘러나왔다.


 “큭…, 그렇죠“


 자조 섞인 양하의 웃음이 아프게도 들린다는 것을 형규는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일까. 가볍게 시작해 죄다 흔들어 놓고 제 자신마저도 깊게 흔들려버린 양하도, 이제는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가는 중일까. 당장이라도 소낙비 한 번 내려준다면 그 순간을 핑계 삼아 서로에게 젖어들고 싶었지만 둘은 애꿎은 술잔을 한 번 더 기울일 뿐이었다.




-




 “저 약혼 해요, 이미 들으셨겠지만“

 “아, 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양하의 차가 있을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길, 덤덤하게 전하는 양하의 소식에 하릴 없이 땅 끝을 주시하던 형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K그룹이라면 도움이 많이 되겠죠. 형규의 진심 어린 조언에 양하도 조용히 긍정을 말했다. 그리고 변호사님, 


 “이거–“

 “….“


 차에 오르기 전, 양하가 내내 쥐고 있던 우산을 형규에게 건넸다. 새 것처럼 구깃한 곳 하나 없이 반듯한 검정 우산이 형규의 손에 건네질 때, 양하는 왠지 또 웃음이 났다. 이제 보니 우산도 변호사님을 닮았었네요, 양하는 말을 삼켰고 형규는 숨을 크게 들이 쉬며 우산 끝을 매만졌다. 


 “이형규 씨,“

 “…..“

 “이제, 비는 그칠 것 같네요“


 양하의 눈에 또 한 번, 오롯이 형규만이 담겼다. 형규도 그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둘에게 남은 것은 또 다시, 말이 아닌 눈빛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알았다는 듯한 표정의 양하가 부드럽게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미련 없이 유유히 동네를 빠져 나가는 차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형규가 손에 쥔 우산에 힘을 실었다.


 “네, 그럴 것 같네요“


 형규의 혼잣말과도 같은 대답만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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