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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합작

[정환택] Fold Me Not

정환택 키워드 합작에 참여했습니다. 

다른 분들의 글과 그림도 이곳 에서 감상 부탁드려요. 

제 키워드는 [사진] 이었습니다.

좋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최 택?”

정신이, 정신이 좀 들어, 환아?”

 그는 깨어났고,

 

으응, 그보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 ?”

대국 없냐구. 나 오래 누워있었어? 눈 뜨자마자 네가 보이니까 새롭다,

“....”

나 학교는 또 얼마나 빠진거야? 최 택, 너 울어?”

 나의 세상은 볼품없이 구겨져 쓰레기통보다도 못한 나락으로 떨어지고야 말았다.

 




[정환택] Fold Me Not

Written by 윤양이 (shp)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일종의 기억 상실증 같은 겁니다

‘... 머리에 충격이 가해지거나 뇌 손상이 없었는데도 그럴 수 있나요?’

환자 스스로 지워버린 기억일 수도 있고, 워낙 이유는 여러가지라서요. 지금 환자는 본인의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네요

꼬박 한 달 만에 깨어난 그였다. 훈련 중 상황 보고 오류로 일어난 큰 사고였고,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정환은 그 중 제일 크게 다치는 것이 당연했다. 이 훈련이 끝나면 휴가를 길게 받을 수 있다며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니 오랜만에 근사하게 데이트를 하자던 정환은, 칭칭 감긴 붕대 사이사이로도 깊게 배인 핏자국이 난무한 모습으로 나를 마주했다. 택아, 고작 두 음절을 내뱉으면서도 덜덜 떨고 있던 동룡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땐, 그가 묶어주고 단 한번도 풀리지 않았던 나의 신발끈이 어딘가에 걸려 뜯겨진 채였고 나는 잃을 뻔 한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서 있었다.

 

택아 내가,’

.’

이러면 안되는 거 아는데., 흐으.,’

너를, 너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언제 어디서나 자로 잰 듯 명확하고 각이 잡혀 있던 그가 내 앞에서 보인 눈물이었다. 사실 정환이 울고 있음은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떨림으로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겨우 그의 입으로 전해진 그 엄청난 고백에 나는 이미 주저 앉아 버리고야 말았으니까. 그렇기에 그 눈물에, 그 떨림에 실린 무게를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 역시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던 그 시간동안 그와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많이 차곡 차곡 쌓아온 무게였더랬다. 그리고 나는, 우리는, 용기를 냈다. 오롯이 서로를 향한 그 마음에 온기를 더했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술을 찾아 들었다. 골목을 울리는 질척한 소리가 하나도 부끄럽지 않을만큼 우리는 간절했고 뜨거웠다.

 

최희동!”

, , 정환아

새끼, 이거 또 얼빠진 것 봐라. , 6년이나 지났다는데 아직도 그렇게 기운이 없냐, 너는

그러니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라고, 나는 당장에라도 그를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우리가 나눈 키스가 몇 번인데, 우리가 나눈 뜨거움의 온도가 얼마인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던 것처럼. 나를, 나의 마음을 이렇게 모조리 지워낼 수가 있는 것이냐고. 나는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말해주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더 이상 정환의 눈동자에 뜨거움이 서리지 않았고, 나를 보는 시선에도 떨림이란 없었다. 불에 데인 듯 뜨거웠던 우리는 그의 기억 속에 없었다. 아니, 그 어디에도.

 

몸은, 괜찮아?”

. 당연하지. 이 형님, 김정환이야. 나 정말 한 달이나 의식이 없었어? 나 완전 팔팔한데

그래도 조심해. 머리 아플 수도 있다고 했어

으이구, 누가 누굴 걱정하냐. 최 택 사범님, 얼른 와. 애들 다 네 방에 모여 있을걸. , 자식들 진짜. 변한거 하나도 없어

자고 일어났더니 6년이 훌쩍 지나버린 것 같은 느낌일텐데도 정환은 의외로 덤덤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내가 공사 합격했었어? 중위라고? 왠열. 최 택 너는 9단이야? 특공대는 스튜어디스에, 야 너희 내가 기억 못한다고 거짓말 하는 것 아니지? 하며 인상을 쓰는 그는 정말로 고등학생 때의 그 모습 같아서 오히려 한 달 내내 마음을 졸이던 아이들의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보다 못한 동룡이가 충격도 안 먹냐고 묻자, 정환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는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너희가 다 그대로 내 옆에 있는데, 뭐가 충격이야. 그의 대답에, 나는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이제 변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오로지 나 뿐이다.

 

 

., 환아!’

흐으, !’

으응, .., 좋아좋아, 환아

이대로,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리면 좋겠다

. 꿈이다. 정확히 말하면, 또 그 꿈이다. 사고 이후 정신이 고등학생 때로 돌아갔다더니 몸의 반응까지 그렇게 된걸까. 여태껏 몇 번 꾸어보지도 못한 종류의 꿈이 등줄기 서늘하도록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이를 상대로 몸을 섞는 꿈이니 당연히 기분 좋을리는 없겠지만 그보다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것은 따로 있었다. 소중하고, 중요한 무엇인가를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찾지 못하는 느낌. 마치 그것을 잃고는 영영 살아가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6년이 훌쩍 지나버린 느낌은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장난스런투로 응하기는 했지만 학생이었던 우리가 각자의 꿈을 찾았고, 꽤 그럴듯한 어른으로 성장해가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안에서도 함께였을테니까. 내 기억이 잠시 사라졌다해도, 아니 이대로 영원히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내가 그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을테니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생활하는 것에 지장이 없었고 한 달이나 누워 있었다는 모두의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나는 멀쩡했다. 한마디로, 괜찮았다. 아무 문제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최 택?”

, .”

귀신 봤냐. 뭘 그렇게 놀라. 그건 뭐냐? ., 어머니 사진?”

., 아냐. 그나저나 왜, 잠이 안와? , 혹시.., 아파? 너 어디 아픈거야?”

. , 무슨. 답지 않게 호들갑은

? , , 미안

이상했다. 내 몸 이 곳 저 곳을 놀란 토끼눈을 하고 확인하는 녀석의 손길이 나는 이상했다. 바람이나 쐬일 요량으로 나온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가 택이가 아니었대도 나는 그 곁에 다가가 자연스레 앉았을 터였다. 똑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하더라도 선우와 동룡이, 그리고 덕선이 마저도 똑같이 녀석처럼 놀란 눈빛으로 내 상태를 확인 했으리라. 헌데, 무엇인가 이상했다. 스산한 새벽 바람에 묻어나는 꽃향기라 치부 하기엔 지나치게 달았다. 꿈을 꾸고 난 직후라기엔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댔다. 이건 분명, 무엇인가 잘못 된거다.

, 잘자라!”

정환아!”

걱정이 가득 서린 녀석의 다급함을 무시하고 도망치듯 대문을 올랐다. 부르지 마, 최 택. 지금 나 좀 이상해.

 

 

, 최 사범. 너 요즘 어디 아파?”

?.... 아니, ?”

대국도 확 줄이고 기원에도 하루씩 건너 뛴다며. 그런데 쉰다는 애가 어째 점점 더 얼굴이 안좋아지냐. 야 선우야, 얘 뭐 검사 받아 봐야 하는거 아냐?”

짐짓 엄마 같은 얼굴로 호통하는 덕선의 걱정에, 모처럼 내 방에 둘러 앉아 티비 채널을 돌리던 선우까지 합세해 내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지만 나는 대답 대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은 그 날 밤 부터 잠이 오기는 커녕 그에게서 지워진 모든 기억이 내게만 더 선명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우연히 새벽 이슬을 함께 맞던 그 날 밤, 잠깐이지만 내가 담겨 있던 정환의 눈빛이 처음 우리가 마음을 확인 하기 전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인 것만 같아서.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이후 지금처럼 저렇게 어디든 따라오는 정환의 멍한 시선이 내 심장을 늘 쿵 하고 떨어트렸다. 혹시 무언가 알게 된 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싫어진 건 아닐까. 아니면 혹시, 만에 하나라도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우리를 접어두어야 하는 걸까.

 

? 택이 너 이 사진 안 버렸었네?”

.,

하하. 야 진짜 이 사진은 다시봐도 너무 웃기지 않냐. 개정팔. 이리 와서 이거 봐라. 너는 지금 기억 못하겠지만 2년 전 네 모습이다

. 뭔데

내내 대화에 어울리지 못하던 그가 내 쪽으로 걸어 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정환의 안색부터 살피는 내가 참 싫었다. 이제 이러면 안돼, 최 택. 더 이상 그의 일상에 방해가 되어선 안돼. 정환의 사고 이후 내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이는 주문과도 같은 한마디였다.

이 사진,”

? ? , 야 너 혹시 뭐 기억나? ?”

마주쳤다, 그와 나의 눈빛이. 아이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를 안고 정환에게 질문을 쏟아낼 때에도 그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물음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어떻게든 모른척 해야 하는데. 머리로는 계산이 끝난 그 행동을 몸이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그 어느때보다 세차게 뛰고 있는 내 심장 소리가 혹여 들킬까 두려운 마음 뿐이었다. 이 사진 뭐야. 이거 네가 그 날 밤 보고 있던 사진 맞지. 그는 분명 내게 그렇게 묻고 싶었겠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제 넌 몰라도 돼. 그냥 모른척 지나가도 돼, 정환아.

정환아!!!!”

그가 또 다시 쓰러졌고,

, 환아!”

나는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은 채였다.

 

 

환아.., 환아!’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인 세상이었다. 빛이 새어 나갈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은 곳. 여긴 어딜까. 누가 날 부르는 것 같은데. 내가 꿈을 꾸고 있는걸까. 끝없이 길을 걷는 것 외에는 어떤 움직임도 가능하지 않은 이 터널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서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내가,’

이러면 안되는 거 아는데., 흐으.,’

너를, 너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 저건, 나인데. 누군가의 여린 어깨를 붙잡고 세상 가장 애절하게 고백을 하는 것은 분명 나인데. 그 앞에, 그 앞에 나보다 더 아프게 날 바라보고 있는 것은 대체 누구지. 당장에라도 가서 꼭 안아주어야 할 것만 같은데 몸이 절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 때, 그 여린 손이 내 얼굴을 소중한 보물인 냥 감싸고 볼품 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을 조심히 쓸어 내렸다. 울지 마. 그리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이미 나보다 더 떨고 있는데. 울지 마, 정환아. 그 목소리에 눈 앞에 서 있는 나도, 그리고 지금의 나도, 왜 이리 안심이 되는거지.

나도, 너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 ?’

내가, 내가 먼저였어 정환아. 그치만 도저히, 그래서 접으려고. 접으려고 했는데흐윽.’

그의 고백에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 같았다. 내 눈 앞에 있는 과거의 나도 아마 똑같이 그랬겠지. 결국 그의 아픈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삼키듯 이어진 키스가 뜨겁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새를 가르고, 수줍게 나를 찾는 그와 혀를 섞는다. 미친 듯이 그리던 순간이 현실이 되었을 때, 자꾸만 아득해지는 정신에도 오롯이 가슴에 쿡쿡 박히는, 그 이름. 그건,

사랑해

.’

사랑해, 택아. 사랑한다, 최 택

택아, 최 택.

 

잘 나온 사진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좋아

잘 나왔어. 특히 여기가 제일 맘에 들어

 퍼즐처럼 꼭 맞춘 듯 내 품 안에 안긴 택이가 웃었다. 동룡이가 새로 장만 했다며 자랑스럽게 들고 온 카메라로 오랜만에 우리 다섯명 모두를 사진에 담던 날, 실수로 찍혔던 사진이었다. 필름 한 장이 아깝게 날아갔다며 인화 된 사진을 들고 울상이었던 동룡이에게 택은 그 사진은 제가 갖겠다고 했다. 이거 초점도 하나도 안맞았어. 하는 말에도 괜찮다던 녀석은 어느 한 부분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더랬다. 그리고 굳이 한 장 더 인화 해 내게 건네주기까지.

우리 손 잡은 것 찍혔어

?’

여기. 그림자

아이처럼 배시시 웃는 택이의 손가락이 사진 속 어느 한 부분을 콕 찝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서 준비를 하던 중에 아무도 모르게 살짝 쥐고 있던 서로의 온기.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사진 속 한 귀퉁이에 작게, 그것도 그림자로 찍힌 것이 너무 신기하다며 택은 자꾸만 그 사진을 만지고, 또 만졌다. 그림자가 기억해줬네. 하고 웃던 택은 곧 그 부분을 꼭꼭 접어 눌러 뒤로 숨긴다. 왜에. 좋다며. 사진 구겨지게 왜 접어. 내 물음에 동그란 두 눈이 예쁘게 나를 마주했다.

지금은 잠깐, 접어둬야지

택아

나중에. 나중에, 환아.’

 부러 괜찮다며 몸을 더 가까이 해 오는 녀석을 나는 꼬옥 끌어 안았다. 이윽고 맞물려진 입술은 늘 그렇듯이 세상 그 무엇보다 달콤하다. 셔츠 끝자락을 말아 쥐며 새하얀 속살을 지분대기 시작한 내 손길에 으응, 하고 솔직하게 새어 나오는 녀석의 숨소리는 노래와도 같았다. 내 소중한 사람. 한없이 미안하고 그만큼 더 고마운 너. 내가 기억할게. 사진 속 그림자가 아니라 내가, 우리의 이 모든 순간을 기억할거야 택아.

 

 

택아!”

어 김정환! 정신이 좀 드냐? 괜찮아? 야 잠깐 있어, 내가 우리 치프쌤,”

, 선우야

. . 어디 안좋아? 말해봐. ?”

택이, 택이는?”

택이? 택이 오늘 대국 있었어. , 너 며칠만에 깨어난 줄 알아? 다들 얼마나 걱정, ! 김정환! 너 뭐하는 짓이야!”

나 좀 가봐야 돼!”

, 안 돼! , 김정환! ! 야 이 새끼야!”

달리고 또 달렸다. 김정환, 이 나쁜 자식아. 네가 어떻게, 감히 어떻게 택이를 잊어. 다른 사람은 다 잊어도 택이는 기억했어야지.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자책의 말들이 무거워 숨이 찬 줄도 몰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꼭꼭 숨겨둔 마음이었다. 닫고 또 닫고, 접고 또 접다가 더는 숨길 수 없어 토해내듯 고백한 마음을 겨우 서로에게만 열어 보이던 우리 둘이었다. 네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싫다던 내 투정까지 고스란히 감싸 안아주던 내 사랑을, 내 하나뿐인 최 택을 잊을 수는,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쯤이었던 것 같은데

  찾아야만 했다. 무슨 정신으로 뛰어 왔는지 몰랐다. 허겁지겁 대문을 열고 문이 부숴질 듯 내 방문까지 열고 나서야 모든 기억이 차츰 더 선명해졌다. 나는 이 곳에서 택을 그리워했고 그를 향한 마음을 키워갔으며 그 때문에 수많은 날을 뜬 눈으로 지새워야 했음을 이제야 기억해냈다. 방 한 쪽에 자리한 옷장 속, 아주 깊은 곳. 내 기억대로라면 분명 여기에 있어야 했다. 제발, 제발 있어라. 간절한 외침이 소리 없이 계속 되던 순간,

찾았다

손 끝에 걸리는 네모반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저릿할 정도로 주먹을 꼬옥 말아 쥐었다. 택아, 기다려.

 

하아

 평소보다 길었던 대국이 끝나고 걸어 들어오는 동네의 골목길은 지금 내 마음만큼이나 어두웠다. 결국은 오늘 대국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정환아, 너를 잃고 나면 내게 아무것도 없어서 바둑이라도 꼭 함께이고 싶었는데. 그 마저도 내게 허락 된 시간이 길지 않나봐. 닿지 못할 속내인걸 알면서도 마음속으로 자꾸만 그에게 말을 건넨다. 그와 연인이 되고 나서, 내 귀가길은 한 번도 어둡지 않았다. 대국에서 이기면 이기는 대로 나를 꼬옥 안아주었고 수고 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였다. 지면 지는 대로,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고 나를 북돋아주었고, 없으면 없는 대로 에너지 충천하고 가라며 나를 기다리고 안아주던 그였다.

"보고 싶다

 너는 없는데. 늦은 밤 신발을 땅에 툭툭 부딪히며 서 있던 너는, 수고했다며 나를 보고 옅게 미소 짓던 너는 이제 없는데. 너를 보내지도, 이 마음을 접어 내지도 못하는 나는 이제 정말 어떡해야 하지, 정환아. 들어 주는 이 하나 없는 이 답답한 마음이 자꾸만 한 숨이 되어 흐르던 그 때였다.

 

"..., 접지 마. 택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는 건 이런 걸까. 네가 깨어난 후 나를 보고 전에 없던 눈빛으로 최 택 하면서 내 이름을 불렀을 때에도 이만큼은 아니었는데. 내 등 뒤를 감싸는 너의 넓은 품, 내 허리에 감긴 너의 단단한 팔, 그리고 뛰어왔는지 거칠어진 너의 숨소리까지. 이건 정말,

"..., , 환이야?“

 환아. 정환아. 나의 정환아. 정말, 정말 너야? 당장 뒤를 돌아 네 모습을 확인해야 하는데 목석처럼 굳은 몸이 너무 떨려 와 도저히 뒤를 돌아 볼 수가 없었다. 환아.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에 이미 목소리가 정신없이 떨리고야 말았다. 정말, 정말 너야?

"최 택, 이 바보야. 줘 패서라도 기억나게 했어야지

"흐읍..., 환아...,“

"널 어떻게 기억 못 할 수가 있느냐고 소리 쳤어야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 하나뿐인 사랑, 나의 기억의 전부인 김정환이었고, 누구보다 여리고 다정한 나의 연인이었다. 땀이 범벅인 얼굴이었지만 나는 알았다. 그도, 나처럼 울고 있다는 걸. 작게 떨리는 그의 온 몸이, 그러면서도 절대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욱 힘을 주어 안아오는 손길이 애처로워 그의 따뜻한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잡았다. 그리고 그제야 발견한,

 

"환아

"접지 말라고 했잖아

 사진, 이었다. 우리의 마음처럼 꼭꼭 숨겨 그림자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애써야 했던 우리의 비밀스런 그 사진이, 접혀진 곳 하나 없이 숨겨지지 않은 온전한 모습으로 그의 손 안에 들려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기에 나의 흐느낌은 점점 커져 어느새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엉엉 울어버렸다. 한참만에야 오롯이 닿은 시선엔, 내가 그리도 바라던 나와 그, 우리를 바라보는 최 택의 김정환이 있었다.

"이젠 그림자만 기억하게 두진 않아

"....“

"내가, 다 기억할게 택아.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내가 하나하나 담을거야

 보고 싶었어. 그의 뜨거운 진심이 또다시 나를 울렸다. 울지 마. 부드럽게 내 차오른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내던 그의 다정한 손길에 자꾸만 목이 멘 나는 그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며칠 새 많이 말라버린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나는 또 한 번의 용기를 냈다. 서툴지만 천천히 닿기 시작하는 나의 입술을 바라보며 그가 비로소 내가 알던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보고 싶었어, 환아.

 

"최 택,“

 그가 다시 돌아왔고,

"사랑한다

 우리는 다시, 서로의 기억 속에 사진을 남긴다. 어쩌면 영원히, 접히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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