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할래요"
"뭐?"
"안하고 싶어요. 결혼"
허. 성준의 굵은 눈썹이 파동을 일으키며 크게 휘어졌다. 성준은 문득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 옆 작은 네모 상자가 알려주는 숫자는 분명 오늘을 뜻하는 날짜가 맞았다. 그런데 왜 난 이 까페에, 정확이 이 자리에, 정확히 내 앞에 앉아있는 안영이와 오늘도, 어제도, 저번주도, 또 그 저번주도- 같은 대화를 하는건지.
답답한 마음에 꽉 잠긴 셔츠 윗 단추를 풀러내고 이미 다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술 마시듯 원샷해버렸다. 정작 말을 뱉은 안영이는 태연한건지 어쩐건지, 할 말만 툭 던져놓고 아까부터 창밖을 응시한다. 하아,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한숨에 영이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성준과 시선을 맞춰왔다. 영이의 눈빛이, 한없이 공허하다.
순탄하다고 생각했었다. 불같은 사랑이라던가 달콤한 연애라던가 하는 것들과는 조금 동떨어진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여하튼 하성준과 안영이도 연애를 했다. 한 순간 파바박 튄 불꽃이 좀 아니면 어때. 옆 자리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많은 것을 공유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가족보다 자주 보는 사이였고, 팀원이나 사수와 부사수라는 관계보다는 훨씬 더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여겼다. 지켜주고 싶었고 기대고 싶어했다. 그거면 된거 아닌가, 남녀 사이에?
손을 잡으면 떨렸고, 품에 안으면 따뜻했고, 입술을 탐할 때는 달콤했다. 침대에서는 그 어느 커플보다 황홀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수도 있었다. 뭐 물론, 묻는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대리님, 하던 호칭은 이따금 성준씨, 혹은 흘리듯 슬쩍 나오는 자기야, 로 바뀌어 있었다. 안영이, 하고 뒤에 느낌표가 꼭 붙어야 할 것만 같던 툴툴은, 영이야- 영아- 하는 낯간지러운 호칭을 어느정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안영이가 머무는 공간에 하성준이, 하성준이 작게 마련한 공간에 안영이가 들어 있는 그림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 결혼하자
- 그래요
한 쪽 무릎은 꿇지 못했지만, 반지는 있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그러니까 자원팀 보고서를 건네 줄 때는 미처 어찌 생겼는지 신경 쓰지도 못했던 그 예쁘고 여린 왼쪽 네번째 손가락에, 작은 반짝임이 비로소 주인을 만나는 순간, 성준은 떨림에 입술을 깨물었다. 영이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히는 것도 같았고, 포근한 저녁이 이어졌다.
성준의 부모님을 만나 뵐 때보다, 제 부모님 앞에 성준을 세워 둘 때 영이는 몇 배나 더 긴장을 했다. 크고 두툼한 성준의 손이, 가늘게 떨려오는 영이의 손을 잡아주자 영이는 비로소 부모님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영이를 아가,라 칭하시며 형수님과 더불어 막내딸 하나 얻은 것 마냥 좋아하시던 성준의 부모님만큼의 환대는 아니었지만, 씨암탉은 없어도 정성껏 차리셨을 한 끼를, 예비 장인이 손수 따라주시는 술 한잔과 함께 잘 얻어 먹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소화제 한 병이 필요했지만, 뭐 그것은 영이도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성준의 어머니가 길일이라며 받아오신 몇 개의 날짜 중에 자원팀이 추진중에 있는 사업이 얼추 마무리 되는 시점을 골라냈다. 이 즈음, 매일 얼굴을 맞대며 사는 또 하나의 가족, 회사 식구들에게도 결혼 사실을 알렸다. 도둑놈부터 미녀와 야수까지 다양한 별칭을 얻으며 모두에게 커피를 한 잔씩 사 돌리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되도록이면 약소하게 치르고 싶다는 의견에는 서로 한 치의 이견이 없었다. 대신 친정 언니도, 미리 결혼한 친구도 많지 않은 영이를 배려해 플래너와 함께 진행하자고 했다. 꽤 목돈이 나갔지만 바쁜 두 사람에게 비용대비 효율적인 면들이 많아 불만은 없었다. 2~3일에 한번씩, 신부님, 신랑님, 하는 메세지가 왔고, 대부분 영이가 대답하는 것을 택했다. 사실, 뭘 입혀도 영이면 다 예쁠 것 같았고, 어딜 가도 영이와 함께라면 경치가 어떻든 행복할 것 같았기에 성준에게 수 많은 옵션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 대리님,
- 엉?
- 결혼 안하고, 그냥 살 수는 없겠죠?
잔잔한 호수에 돌이 던져진 것은 어쩌면 그 때부터였나. 놀란건 아니지만 그 말이 잘 이해 되지 않아 우선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저도 모르게 끼익 하는 둔탁한 소음을 만들어냈지만 영이는 태연한 듯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그게, 결혼식을 하지 말자는 건지 결혼 자체를 하지 말자는 건지 모르겠어서 다시 한 번 물었었다.
- 그냥요. 그냥. 그냥 살 수는 없나?
그냥이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꽤 무겁고 무책임한 말이라는 걸, 그 때 깨달았다. 결혼식을 안해도 상관없고 결혼을 안하는것도 크게 문제되는 일은 아니었다. 왜 여자가 있으면서도 결혼을 안하냐는 가족들의 잔소리쯤이야 이제 슬쩍 넘겨버릴 수 있는 내공은 충분했다. 제도적인 것에 대한 마음이 불편한 것이라면 그것도 없는 셈 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그냥,이 주는 텅 빈 어감이 꼭 꽉 채워진 우리,가 아닌 것만 같아서. 차마 쥐고 있던 핸들을 놓고 영이의 어깨를 안을 수가 없었다.
안하고 살 수는 없겠죠? 하던 질문형의 문장은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면서 점점 안했으면 좋겠어요, 안하면 어때요, 하는 쉼표가 가득한 문장으로 변해갔다. 영이야, 왜그래, 달래도 보고 자꾸 사람 놀리듯 그러는 이유가 뭐냐고 종용도 해 보았지만 영이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냥요. 모르겠어요, 왜이러는지. 그 대답에, 영이와 만난 이후 애써 참아왔던 흡연 욕구가 불현듯 다시 솟구치기 시작해 결국 참지 못하고 한 갑을 사 물끄러미 노려만보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 어, 그거 메리지 블루 아니에요?
한석율. 나름 있는 머리 없는 머리 다 굴려 골라 낸 사람이었다. 차마 평소에 인사도 몇 마디 못 나눠 본 여자 직원들께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기 대리들 중에 몇몇을 생각하다 그만 두었다. 모쏠인 김동식은 애초부터 제외하더라도, 철강 글자 그대로인 강해준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바람둥이에 입까지 가벼운 성준식한테는 입에 폭탄을 물리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한 단계 내려 영이의 동기라인을 생각했다. 세 명 다, 저와의 관계는 깊지 않았지만 하나뿐인 여자 동기 안영이를 여동생만큼이나 아낀다는 것은 익히 느낀 사실이었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한석율도 안영이에 관한 것이라면 쉬이 떠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여자경험이 많다는 말을 들었으니 미혼이지만, 적어도 저보다야 많이 알고 있겠지 싶어 선택하긴 했는데...,
- 메리지 블루? 그게 뭐야?
- 와, 대리님. 예랑 맞으십니까? 어떻게 메리지 블루를 모르실 수가 있으세요?
- 시끄럽고. 그게 뭔데.
- 메리지, 결혼이란 단어와 블루, 우울이라는 단어의 합성어. 결혼 앞두고 여자들 많이 우울해 하는 시기가 있다더라구요. 준비하면서 생기는 트러블 때문에도 그렇고, 변화되는 과정이 두려워서도 그렇고. 대리님 혹시, 집에서 우리 멋지고 이쁜 안영이씨 반대하십니까?! 예?! 그러신 겁니까?!
- 까분다. 무슨 반대야. 두 팔 벌려 환영이신데.
- 그럼 대리님이 이것저것 안 도와주시는거 아니에요? 영이 씨 의견 안따라주고, 막?!
- 쓰읍, 너 말이 짧다?
-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영이 씨 의견 안 따라주고 그러시는 것 아니십니까?
- 안 따라주고 말게 없어. 플래너가 선택지를 주면 영, 아니 안영이가 고르고. 좋냐고 물어보면 좋다고 해줬어.
- 대충대충, 어디든, 뭐든 좋다고 하신거 아닙,
- 이게 진짜. 야! 관둬. 딱 보니 너도 뭐가 뭔지 모르는 모양인데. 어휴, 내가 미쳤지
- 아 대리님, 잠깐, 잠깐만요. 이대로 가시면 어쩌시게요.
후우. 성준은 제 뒤춤에 숨긴 것을 한 번 보고 기어이 열 번째 한숨을 뱉어냈다. 이벤트. 짧지만 강렬한 세 글자가 한석율의 처방전이었다. 이벤트. 어설프게 초록창에 검색을 해 보았더니 풍선달고 현수막 어쩌고 하는 것들이 즐비했다. 잠깐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 취향은 말할 것도 없이 평소에도 심플하고 간결한걸 좋아하는 영이가 그런 잡다함을 좋아할리 없었다. 그 때 성준의 눈을 사로잡은 한 줄의 문장. 꽃 싫어하는 여자는 없어요, 알러지라면 모를까.
사실 읽고서 지레 찔려 짧은 숨을 한 번 내뱉었다. 영이가 외근을 나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슬금 눈치를 볼 뻔 했다. 꽃을 선물한 적이 있었던가. 그보다 꽃을 선물할만한 일이 있었던가. 기념일은 고사하고 생일 역시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가 일에 밀려 가지 못했다. 영이의 집에서 케익 하나에 초를 켜고 준비한 선물을 건넸던 밤은, 열두시가 되기 10분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를 외쳤었다. 그러니 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꽃 한 번 선물한 적이 없는 연인이 된 죄책감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 진짜 사신거에요? 성준씨가요?
- 그렇다니까.
- 왜, 왜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저 생일 아닌데? 대리님 사업 벌써 승인났어요?
- 야, 아니 안영이. 아니아니, 영이야. 나 그렇게 못된 놈이냐?
- 네?
- 나 네 애인이잖아. 결혼할 사이. 이 꽃 한다발이 그렇게 크게 다가갈 일인가 해서.
- 아니......
- 그래. 안하던 짓. 맞아. 맞는데, 너도 요즘...,
- 네?
- 아니. 아냐. 그..., 기분은 좀.. 풀렸어?
너도 요즘, 너답지 않아 안영이. 라는 말은 끝까지 삼켰다. 슬쩍 눈치보며 건넨 성준의 말에 영이는 샐쭉하게 웃었다. 글쎄요. 저 요즘 기분 나빠 보였어요? 하고 되묻는 반응에는 할 말을 잃었다. 응. 이라고 말할 수도 아니. 라고 말할 수도 없어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오늘은 넘어가자. 오늘만 날이냐. 뭐가 됐든 꽃 한 송이는 잠깐이나마 영이의 기분을 낫게 한 것 같았다. 아닌 척 해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꽃잎을 만져보고 향기를 맡아보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꽃 한다발에 저렇게 웃을 줄 아는 여자라는 걸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안영이를 웃게 하는 것들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음을 알았으면 그 메리지 블루인가 뭔가 하는 그것. 겪지 않게 할 수 있었을까.
- 영이야
- 네..?
- ... 아니다.
- ... 네에..
미안해. 혹은 사랑해. 그것도 아니면 이런 나랑 결혼을 결심해줘서 고마워. 중에 뭐 하나는 꼭 말하고 싶었는데. 30년이 훌쩍 넘어서도 애정표현이라면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듯한 느낌이 쉬이 사라질리가 없었다. 그나마 영이와 만나고 나면서부터 정말 변하고 또 변해가고 있는 것이었는데. 최근 어딘가 한 뼘쯤 공허한듯한 영이의 눈빛을 마주하면서부터는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결국 달싹이던 입술을 떼지 못했다. 처음 영이에게 마음을 고백할 때도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었는데. 늘 순탄함의 연속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관계는 자꾸 복잡하고, 어려워져만 갔다. 그리고,
"안할래요"
"뭐?"
"안하고 싶어요. 결혼"
결국 성준이 곁에 있어 주는 것으로는 영이의 공허한 눈빛이 채워지지 않은 듯 했다. 똑같은 대화가 다섯번쯤 오갔을 때, 성준은 딱히 무엇으로 채워주어야 하는지도 이제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영이가 말하는 안하고 싶어요,에 너무 많은 말이 들어가 있는것만 같아 답답함이 온몸을 옥죄어 왔다. 창 밖만을 응시하는 영이의 눈빛에는 성준이 담겨있지 않은 채였다. 식어버린 아메리카노. 그런건 상관없었다. 까만 그 큰 두 눈동자에 담긴 알 수 없는 의미들을 파악하느라 제 속이 더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영이는 또다시 말이 없었다. 결혼을 하기 싫다는 것. 혹시 나와의 관계도 포함되는 일이냐고, 물을 수 없었다. 까페 안의 공기가 탁하고 답답하고 무겁기만 했다. 나가자, 이만. 절대 다정할 리 없었던 그 말투에 영이는 끄덕였고, 비어버린 찻잔 두 개만이 우리가 있던 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두 어 걸음쯤 앞서가는 영이의 곁에 차마 다가가 손을 잡아 줄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는 말도 이젠 의미 없겠지. 저도 모른다는데. 왜 그냥, 다 안하고 싶어지는지 모른다는데. 어느새 겨울은 사라지고 봄이 왔다. 작년 초 가을쯤 시작한 연애였으니 처음 맞는 봄에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혀 내 사람을 만들고, 처음 맞는 여름에는 완연한 하나가 되어있기를 바랐다. 작게 품은 소망이 바닥에 흩어지는 꽃잎보다도 더 아스라히 사라지는 것 같아 씁쓸했다. 흩날리는 꽃잎이 영이의 머리에도, 어깨에도, 그리고 바짓단에도 닿아 팔랑거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울하다해도, 예쁜데. 너무 분에 넘치는 마음 같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인데. 너는 끝을 말한 적이 없는데 나는 왜 자꾸 이것이 우리의 끝인 것만 같은지...,
"대, 대리님? 성준씨, 왜요"
"잠시만. 앉아 봐"
무작정 손목을 끌어 벤치에 앉히는 성준 때문에 영이가 놀라 토끼눈이 되었다. 벤치를 메우는 꽃잎들을 손으로 쓸어 한 쪽으로 치워둔 말끔한 자리에 영이를 앉히고, 그 앞에 망설임없이 한쪽 무릎을 꿇은 성준이 있었다. 대,리님..? 어색하게 돌아오는 부름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저, 눈 안에 들어온 것은 끈이 풀려버린 옅은 핑크색의 로퍼였다. 왜 맨날 끈이 풀려도 모르는거야.
"아..."
정말 몰랐는지, 발끝에 주춤거리는 망설임이 일었다. 있어봐. 이번에도 다정하지 못한 말투였지만, 끈을 조이고, 조심스레 매듭을 지어가는 성준의 큰 손은 세심했다. 한차례 봄비가 쓸고 지나갔던 밤의 도로는 아직 질척였고, 그로 인해 성준의 한 쪽 무릎이 그 짧은 새에도 축축히 젖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영이의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신발 끈 하나 매어 주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은데, 왜 마음 그대로 입술에 담는 것은 몇 배가 어려울까. 오늘이 지나면 더는 말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와 성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여전히 시선을 영이의 발끝에 둔 채, 낮은 목소리로 겨우 운을 뗐다. 안영이.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결혼..."
"......"
"그런 것, 사실 아무래도 상관 없었어. 예식이니, 뭐니 하는 것들"
"......"
"나 사실, 뭐가 널 불안하게 하는 건지 잘 몰라. 알잖아, 나 둔한 것"
"......"
"그런데, 멍해지는 네 시선은 너무 두려워"
"......"
"영이야..."
성준 특유의 투박함을 없앨 수는 없었지만 분명 부드러운 어조였다. 그리고, 떨려왔다. 네 두 눈에, 내가 없는 것은 두렵다 영이야. 용기를 내 영이와 시선을 맞춘 성준은 놀랐다. 흐읍.., 소리도 없이 그렁하게 맺힌 두 눈이 흔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얼른 옆자리에 앉으니 물기 어린 시선에 오롯하게 성준만이 담겼다. 오랜만이네. 굵은 엄지 손가락으로 조심히 영이의 눈물을 닦아 내는 성준이 옅게 웃었다. 왜 울어. 너 원하는대로 해 영이야. 그러자. 나 결혼식같은 거, 아니 결혼 같은 거 안해도 돼. 그저 오랜만에 저를 담아주는 그 맑은 눈동자가 행복해서 늘 표정이 없던 성준의 입매가 조금이나마 호선을 그리며 부드러운 말들을 쏟아냈다. 실로 그 답지 않은 말들에 작게 도리질을 하던 영이는 제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성준에게 건넸다. 성준씨 바지...,
"... 젖잖아요, 바지"
무척 속상한 투로, 이미 젖어버린 성준의 무릎께와 저 우는 것만을 신경 쓰느라 털썩 앉아버려 다 젖어 있을 그를 걱정하는 영이가 작게 투덜댔다. 하지만 원망일랑 섞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움이 가득한 어리광이었다. 아아. 그제야 성준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됐어, 이게 뭐 대수라고. 진심이었다. 젖어버린 바지야 갈아입으면 그만이고, 세탁하면 얼룩조차 희미해질테지만. 영이의 풀려버린 신발끈은 꼭 고쳐 매주고 싶었다. 늘 저를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영이는. 꼼꼼한듯 보여도 늘 한 구석 허둥 댈 때가 있었다.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신발끈은 늘 풀리기 일쑤였고, 가방도 꼭 지퍼 끝이 열려있을 때가 많았다. 다 잃어버려야 정신 차리지? 언제부턴가 그를 챙겨주는 것은 모두 성준의 몫이었다. 조금은 빈틈이 있는 영이가 좋았고, 그 빈틈을 메워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뭐든 상관 없어 결혼식도, 결혼도. 그 어떤 것도. 그리고, 젖어버린 바지도.
"참.., 그만 울어"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우리 그림은 항상 내가 너 울린 못된 놈이야. 사람들의 시선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지만 부러 할말이 없어 던진말에 영이가 큭,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게 또 그렇게 예쁠건 뭐냐, 안영이. 이제야 좀 웃네. 정말 안도감이 들어서 튀어나온 말에는, 영이가 민망한 듯 고개돌리면서도 표정이 풀어져 있었다. 영아. 내 부름에 맞닿은 얼굴이 예뻐 그대로 입술을 탐했다. 미처 흘러내리지 못하고 맺혀 있던 눈물 한줄기가 영이의 볼을 타고 흘러 입술에 닿았다. 수 없이 입술을 맞추고 안아 왔지만, 마치 첫키스처럼 떨리는 그 느낌이 좋아 조금 더 깊게 움직임을 더하자, 평소라면 누가 봐요, 하면서 수줍게 밀어냈을 영이도 그저 가만히 따라오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쳐다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영이와 나, 둘에게는 아무것도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망설이다 내 목에 두 팔을 감아오는 그 꽉 찬 행복감이면 충분했다. 더 이상 바랄것도, 필요한 것도 없었다. 그 곳엔 오로지, 우리 둘 뿐이었다.
"미안하다"
"... 성준씨가, 왜요"
"좀 더 신경써야 했다는 거 알아. 근데 워낙 그런거 못하는 놈이잖아, 나"
"대리ㄴ..,"
"고마워. 이런 놈하고도, 결혼 하겠다는 마음 먹어줘서. 그 하나면 충분했는데, 절차같은 거 복잡했으면 다 생략하자. 처음부터 나한테 별로 필요하지 않았어. 오히려 여자한테는 꼭 필요하다기에, 한 거였지. 나 정말 괜찮다, 영이야"
널 힘들게 하는 일이면 뭐든 하고 싶지가 않아. 그것이 진심이었다. 그 말에 또다시 도록도록 떨어지는 눈물에 결국 짧은 숨 한번이 뱉어졌다. 왜 자꾸 울어. 안타깝게 바라보자 그 때문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알게 모르게 마음에 쌓아둔 눈물이 많았구나. 뭐든 흘러가는대로 두기만 하면 우리는 그 속에 있을것만 같았는데. 말을 하지 이 바보야. 처음부터 더 세세히 알아채지 못한 건 분명 제 탓이었는데 괜시리 그것이 더 미안해 그 여린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영이탓을 했다. 서툴게 토닥토닥 작은 등을 토닥이자 영이는 한참을 그렇게 말 없이 안겨만 있었다. 그간 차마 혼자 쏟아내지 못했을,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모조리 흘러 나오는 눈물에 성준의 어깨가 젖어 들었다.
".... 사랑해"
진작, 했어야 했던 말. 어쩌면 가장 필요했을 그 말. 너를 사랑해서 곁에 두고 싶었고 너를 사랑해서 밤마다 널 혼자 들여보내는 것이 싫었다. 내 것이었으면 하는 소유욕보다는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컸고 눈물로 가득했던 네 삶을 행복으로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모두 너를 사랑해서였어. 두서 없이 쏟아낸 고백에 영이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사랑해. 한 번 더 용기있게 나온 진심에 영이는 내 품을 빠져 나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빨개진 두 눈, 훌쩍이는 붉은 콧잔등마저 너무 예쁘다, 너는. 차마 이 말까지는 낯부끄러워 전하지 못하고 빤히 바라만 보는데, 영이가 웃었다. 대리님. 아니, 성준씨.
"....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었나봐요"
공허한 그 마음이 왜 채워지지 않는지, 행복해야만 할 결혼 준비가 왜이렇게 버겁기만한지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야 그 의미를 알았어요. 불안했었나봐요. 마음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냥 늘 알고만 있던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나봐요. 나도 여자였나봐요, 어쩔 수 없는. 영화 대사 같은데, 정말 그랬었나봐. 물기가 거두어진 영이의 목소리는 밤하늘 그 거리를, 제 귓가를 예쁘게 울리고 있었다. 확신이 가득한 영이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지고, 별빛보다 아름다운 미소가 성준에게 닿았다.
그리고...,
"결혼해요 우리"
"영이야..,"
나는 정말 그런 절차 상관없어. 어른들 때문이면 내가 설득할게. 버거운 것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나는 이미..., 행여라도 저를 위한 결정일까 싶어 재차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하는 내게 영이 역시 아니라며 도리질을 한다. 그리고, 내가 묶어 준 신발 끈을 한 번 바라보더니 부러 바닥을 탕탕 치며 일어났다. 뭐하는거야.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쳐다만 보던 내게, 영이는 약지에 내가 끼워준 반지가 있는 왼손을 예쁘게 내밀었다. 그 어느 봄빛보다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영이는,
"하성준 씨, 저랑.. 결혼 해 주세요"
안 할 거에요? 응? 하고 재촉하는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모두 사랑스러웠다. 하하, 답지 않게 큰 소리의 웃음이 나왔다. 심장께가 간질거린다는 건, 이럴 때 하는 말이구나. 조용히 내밀어진 영이의 손을 맞잡아본다. 고마운 사람. 미안한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나의, 하성준의 사람.
"두 말하면 잔소리. 결혼하자, 안영이"
봄 꽃이 만개한 어느 밤, 우리는 그렇게 두 번째 프로포즈를 했다. Marriage Blue 아닌, Marriage Happiness를 위해.
부족한 필력에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거나
감상평*_*을 남기고 싶으시다면,
1) 댓글 ↘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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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애용(?) 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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