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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단편

[석율그래] Scandal (feat. 해준백기)

배우 한석율 X 레지던트 장그래 AU 





"자요, 이건 비타민, 이건 감기약, 이 하얀통은 두통약, 얘는 위장약. 아, 그리고 이건 혹시 몰라서 석율씨 알러지 약. 뭐 가려 먹어야 하는지는 이제 말 안해도 알죠?" 
"으응.." 
"아이 참- 그러고 있지만 말고 똑바로 잘 좀 들어요. 약은 섞이면 큰일 나. 여기 처방전까지 끊어 왔으니까 챙겨 가구요. 응?" 
"... 하나 빠졌어어-" 

응? 뭔데? 뭐지, 뭐 빠졌지? 그래의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그래의 옆에 딱 붙어 앉아 그에게 여기저기 쪽쪽 뽀뽀를 하고 살을 부비던 석율이 늘어지게 말하자 그래가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자꾸 품을 빠져 나가려는 그래를 붙잡아 저를 마주보게 한 석율이 말한다. 



"내 만병통치약, 장그래" 



그의 대답에 오글거려, 하면서 입을 삐쭉이던 그래도 싫지는 않은 지 샐쭉하게 웃어보인다.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눈꼬리가 추욱 쳐지도록 울상이 된 석율을 바라보던 그래가, 그 끝을 잡아 주름을 펴주면서 쪽, 그의 입술에 닿고는 웃는다. 잘하고 와요. 








Scandal (feat. 해준백기)

written by shp











사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기간의 차이와 거리의 차이는 있었지만 화보 촬영이나 광고 촬영을 이유로 석율은 해외에 나간적이 많았었다. 엄청 초반에는, 그래도 가까운 일본이나 아시아권 등지에 한 두어번 함께 동행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 된 지 오래였다. 드라마에 이은 영화, 그리고 또 다시 드라마. 성공이 가져다 주는 댓가는 분명했다.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니 응당 그래야 맞는 것이겠지만, 얼마 전, 그래에게 빙수를 사다 주겠다던 석율의 동선이, 그가 그래에게 채 도착하기도 전에 마치 CCTV를 보는 것처럼 인터넷에 초 단위로 올라왔을 때, 그래는 경악했고, 전혀 다른 의미의 서프라이즈를 받아야 했다. 누가 이런 것 사다 달랬냐며 다그치던 그래에게, 석율은 괜찮다며 웃어보였지만 그 이후 한동안, 석율은 하나병원에 나타나지 못했더랬다. 

그래가 석율과 같은 아파트에, 다른 층으로 이사를 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래의 병원에서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걸음만 뗐다 하면 파파라치컷이 난무하는 이 시기에 석율의 집이 아닌 곳을 드나드는 모습이 좋아 보일리 없을 것이란 판단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장 내일부터 한 달을 보지 못할 연인의 약을 챙겨주겠다는 핑계로, 이렇게 잠깐 짬을 내어 볼 수 있는 여유조차 허락되지 못할 테니까. 



"휴가.. 안되겠지?" 
"휴가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우리 배우님의 유명세가 문제지" 


침대 헤드에 기대 누운 석율의 품에 안긴 그래가, 손가락을 꼬물대다 석율의 손가락에 겹쳐 쥐었다. 석율은 그런 그래의 머릿칼을 간질이다 또 여기저기에 뽀뽀를 퍼부었다. 


"그래도 혹시 휴가가 되거나 오고 싶어지면 전화 해, 바로 비행기 타게 해줄게" 
"흐응, 바빠요-" 


그래가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석율에게 안겨 투정을 부렸다. 바빠요, 싫어요, 힘들어, 하는 말에는 진심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래는 부러 더 딴청을 피웠다. 당신이 떠나있는 동안 나도 바쁠테니까, 내 생각일랑 말고 열심히 촬영 하고 오라는 뜻이 숨겨져 있음을 모르지 않기에, 석율은 그저 허허 웃으며 그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음식은, 잘 맞아요?" 
-어, 여기 없는 것 없다? 완전 한국이야 
"다행이네. 먹을 수 있을때 먹어둬요. 내일부턴 한인타운도 끝이라며" 
-응. 나 내일은 사막 가서 막 뛰어야 된다? 
"물 많이 마시구요. 약도 꼭 챙겨 가구요. 응?" 
-아, 우리 자기 잔소리 좋다. 흐흥, 장그래는? 우리 장쌤은 잘 지내고, 잘 먹고 있어? 
"음.., 응. 한석율씨 없으니까 괴롭히는 사람 없어 좋은데요?" 
-어어? 장그래에~ 서운해에~ 
"큭, 그럼 뭐라 그래에~" 
"하하, 귀엽다, 우리 그래. 사랑해에~" 

뜬금없는 석율의 사랑고백에 행복해진 그래가 빠알개진 귀끝을 하고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쩌지 못한 채 웃었다. 그래야, 응? 사랑해에~ 대답을 바라는 듯한 그 재촉에도 쉬이 설렘이 가라앉지 않아 그저 웃고만 있는데 때마침 주머니에 넣어둔 호출기가 진동을 울려온다. 아, 석율씨 나 콜. 끊으려던 그래가, 직전에 전화기를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에, 한석율"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응, 이 선생도" 
"근데 선생님,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아니, 왜?" 
"아.., 아니 갑자기 좀 힘들어 보이셔서요. 선생님은 누가 뭐래도 우리 과에서 가장 기운 넘치셨었는데, 선생님이 우울해 보이셔서 내과 요즘 기운 축 쳐진거 모르세요?" 

농담인 듯 살가운 후배의 말에, 그래가 별 일 아니라는 듯 피식 웃었다. 하지만 속으론 그렇게 티가 났나 싶어 뜨끔했다. 사실, 석율의 부재 때문인지 오프를 내고서도 잠이 오질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샜던 날이 많았다. 술을 먹어야 하나 아니면 수면제를 조금 먹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지만 사실 언제 콜이 올지 모르는 2년차라 그마저도 쉽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잠이 오면 오는대로,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대로 지내다보니 식욕은 저절로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석율에게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전화가 올 때마다 부러 밝은 척을 하긴 했지만, 사실은 그가, 많이 그리웠다. 









-나도 사랑해에, 한석율 


그래와의 통화를 마치고 입꼬리를 씰룩이는 석율을 보던 백기가, 헐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였다. 누구는 스케쥴 정리하고 배우님 컨디션 챙기느라 정작 애인님과 사적인 통화는 해보지도 못했는데. 누구는 틈만 나면 닥터 애인 시간에 맞춰 전화 하느라 식사 때도 매번 프라이빗룸이라니. 백기가 괜시리 더 불퉁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석율이 어깨를 으쓱한다. 


"뭐, 또 왜" 
"형, 나 아예 그만두고 그래 씨로 매니저 바꾸는건 어때요? 아주 애틋해 죽네, 죽어." 
"미쳤어? 이 힘든걸 우리 그래더러 하라고 하게?" 
"헐. 형, 그 발언 나 진짜 상처받는거 알죠?" 
"너야말로 배우 바꿔줄까? 엉? 나만큼 매니저 챙겨주는 배우 있음 나와보라 그래" 
"치. 나 곧 있음 꼬꼬댁 하고 울거야 분명. 닭털~" 


오로지 석율과 해준의 앞에서만 보이는 백기의 아이같은 말투에 석율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피식 웃었다. 얘는 왜 애가 안 크지. 아직도 이렇게 애 같기만 한데 굵직굵직한 일들을 저 대신 척척 해결해낼때면 또 엄청 듬직한 매니저, 장백기 실장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흐뭇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석율과 백기의 유치한 입씨름이 계속 될 때쯤, 누군가 똑똑, 그들의 룸에 노크를 했고, 이윽고 열린 문에서 나타난 얼굴에 석율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빠!" 
"어? 이게 누구야. 재영~ 여기 왠일??" 
"나 화보. 오빠 출국하는 거 기사 보고 알았는데. 이 식당 나 여기 올 때마다 오는 곳이거든. 오빠 왔다고 알려주시네?" 
"이야, 한국에선 바빠서 보지도 못했는데 여기서 보네? 들어와, 밥 먹고 가" 
"형," 


여기가 미국이긴한데, 여긴 지금 한인타운 안이거든? 어디 남자배우가 여자랑 밥을 먹어요. 금세 매니저의 본분으로 돌아온 백기가 미처 잇지 못하는 말을 삼키며 쓰읍 하고 바라보지만 그보다는 석율의 반가움이 한 발 빠른듯 했다. 


"뭐 어때. 단 둘이도 아니고 너 있잖아. 야, 나 얘 진짜 오랜만에 보는거야. 밥 좀 먹자, 응?" 

그럴만은 했다. 지금이야 재영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CF와 화보에서, 그리고 드라마, 영화, 예능까지 종횡무진 섭렵하고 다니는 그녀지만, 사실 김재영의 출발점은 석율과 같은 연극무대에서였다. 그저 연기가 좋다고 달려들어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재영은, 기라성같은 선배들에게 혼나기도 많이 혼나고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왠지 그것이 꼭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쓰였던, 사랑이 넘치는 오지라퍼 한석율은 그를 절대 지나치지 않았고, 재영에게 석율은 언제나 큰오빠 같은 존재가 되었었다. 재영은 그래를 모르지만, 그래는 이미 재영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만큼, 석율 역시 서스럼 없이 친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몇 안되는 여자 연예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요즈음에야 서로가 너무 바빠진 탓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으니. 어쩌면 한국도 아닌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우연치고는 너무 반가워서. 석율은 답지 않게 백기를 보채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얘기 좀 해놓고 올게요, 그럼. 재영 씨는 혼자 오셨어요?" 
"아, 네. 전 이따 전화하면 매니저 언니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네. 형," 
"알았어, 알았어. 문 열어두고 가. 됐지?" 
".. 네. 다녀올게요" 

백기가 나가거나 말거나, 석율은 이미 재영을 붙잡고 그동안의 근황을 풀어놓기에 바빴다. 



"맞다. 오빠 그 때 줄기차게 쫓아다니던 사람 있었잖아. 어떻게 됐어?" 
"흐흥, 이 오빠가 누구야. 벌써 내 사람 된지가 언젠데" 
"와. 진짜? 한석율 정말 끈질겼네. 언제 소개 좀 시켜줘~ 나도 새언니 인사 해야지" 
"얌마 번호나 알려주고 소개시켜달래. 넌 무슨 번호를 6개월에 한번씩 바꾸냐. 저번에 전화했더니 또 없는 번호라던데" 
"요즘 무서운 세상이잖아. 그나저나 예뻐? 사진 없어?" 

석율의 그 '내 사람'이 그래일줄은, 그러니까 남자일줄은 꿈에도 모르는 재영이 자꾸만 사진을 보여달라고 채근했지만 이미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라는 듯, 한껏 여유가 생긴 석율이 웃으며 재영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콩, 때렸다. 어디 오빠꺼를 함부로, 떽. 석율의 말에 입이 댓발 나와 툴툴대는 재영의 모습 또한 어린 시절 연극무대에서 보았던 그 소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오빠, 그럼 영화 잘 찍고 가~" 
"오야, 너도 촬영 잘하고" 
"응. 한국가면 셋이 보자. 알았지?" 
"큭, 그래. 잘 가~" 


재영이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는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 나와 차에 올라탔고, 백기와 석율이 그를 배웅 해 주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간만에 반가운 동생과 좋은 식사 자리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석율의 기분은 평소보다 반쯤 들떠 있었고, 그동안 사실 시차에 빡빡한 스케쥴에 영 맥을 못추던 석율 때문에 신경을 써야 했던 백기도, 그의 그런 모습에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렇게 딱, 30분이나 흘렀을까. 내일 이동을 위해 최소한으로 동행한 스탭들이 석율의 호텔 방에서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백기 역시 스케쥴과 이동 경로를 다시 한 번 체크하던 사이, 백기에게 해준의 회사 번호로 연락이 왔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적인 연락이라는 뜻이었다. 


"네, 대표님" 

-장 실장, 어디야 지금. 한석율 뭐한거야. 


낮게 깔리는 해준의, 아니 강해준 대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백기와 석율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기사 봤냐는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태블릿PC를 켠 백기에게서 복잡한 생각이 그대로 표정이 되어 흘러나왔다. 또한 그를 뺏어들다시피 해, 기사들을 주욱 확인해 나가던 석율 역시, 머리가 아픈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한석율-재영, LA 데이트 포착, 오빠 동생 사이에서 '연인'으로?] 
ㄴ[한석율-재영 열애설, 소속사 측, "본인들에게 확인 중"] 
ㄴ[한석율-재영 열애설, LA 동반 출국?] 
ㄴ[한석율-재영 열애설, 두 사람의 '과거 발언' 화제] 
ㄴ['한석율 열애설' 재영, 누구? '웃는 그녀' 혜린 役] 






-한석율 휴대폰 안돼. 연락은 장 실장 통해서만 가능하고 기사고 댓글이고 다 못보게 해. 
"... 대표님, 형 아니..," 
-.... 지금 기고 아니고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지금 우리 중에 그거 모르는 사람 있던가?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하아..., 미안하다고 전해줘 
"이해, 할거에요" 











[한석율-재영, 소속사 공식 입장 통해 열애 공식 부인 ... "오랜 친한 오빠-동생 사이일뿐"] 


참 빠르다. 손에 쥔 제 휴대폰으로 기사를 훑어 내려가던 그래가, 감정 없는 실소를 터트렸다. 석율의 열애설이 터지고, 그것이 공식적으로 부인되기까지 채 1시간, 아니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전화를 걸어보고, 문자를 보내봤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다. 그래는 잠시 망설이다 백기에게 문자를 보내고, 그대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무사히 촬영만 잘 하고 오라고 전해주세요. 고마워요, 백기씨 - 장그래] 



그렇게 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래가, 순간 시야가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휘청- 했다. 선생님!, 복도를 지나던 간호사님이 이를 발견하고 다가와 얼른 부축을 해주자, 그래가 그를 마다하며 간이 의자에 앉았다. 괜찮아요. 


"괜찮기는요. 여기 잠깐만 계세요. 혈압 좀 재게" 
"저 정말 괜찮아요 김 간호사님. 잠을 좀 못자서..." 
"체온도 재야겠어요. 선생님 열 나시는 것 같아요. 우선 물 한 잔 드릴까요?" 
"네. 그리고 차트도 좀 주시겠어요?" 


복도에 설치된 간이 의자에 앉아서도 차트부터 챙기는 그래를 보던 김 간호사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선생님 그 정도면 중독이세요, 일 중독. 환자 중독. 뒤돌아 물 한잔과 두통약 하나를 들고 오면서 차트를 건네던 김 간호사님을 향해 그래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는?" 
"문자 와서, 바로 전화했었는데 연결 안됐어요" 


백기의 대답에, 알았다며 다시 대본으로 시선을 옮기던 석율이 무심한 듯 툭, 내뱉었다. 미안해, 장 실장. 



"아니에요. 제가 부주의 했어요. 여기도 엄연히 한국 사람이 있고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미안해요, 형. 그리고 대표님도," 
"알아. 해준이 형한테 괜찮다고 해줘. ...큭, 살다살다 재영이랑도 열애설이 다 나네" 
"제발. 형 이제 옛날 한석율 아니에요. 재영씨도 마찬가지구요" 
"응. 오늘 여실히 느꼈다. 나 이제 아무하고나 밥도 제대로 못 먹는거 맞지?" 
"당연하죠. 진짜 내가 형 하나병원 다니는것ㄷ," 

살짝 흥분한 채 말하던 백기가 이내 합, 입을 다물었다. 아, 실수. 지금 하나병원이 왜 나오냐, 장백기. 백기가 어쩌지 못하고 눈치만 살금살금 살피는데, 석율이 자조섞인 웃음과 함께 굳어진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백기야. 네에. 



"그치.. 우리 그래도 나랑 있으면, 이렇게 사람들 입에 미친듯이 오르내릴 수 있겠지" 
"혀엉..," 
"예방주사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 나중에 망치로 세게 깨질거, 오늘 각목으로 맞아본 기분" 
"...아, 혀엉. 뭘 또 그렇게까지" 
"그래한테 빙수 하나도 제대로 못 사다 주는 애인이야, 난" 
"...." 


"너도, 내 욕심이 과한 거라고 생각해?" 


질문형이지만,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누구보다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을 응원했었다. 늘 조바심을 냈지만, 어떤 경우에든 그들을 위해 막아서 줄 것이라 다짐하기도 했다. 그 상황에 해준과 제가 놓였대도, 석율 역시 같은 행동을 할 테니까. 말하지는 않았지만, 석율 역시 늘 불안해하고 있던 사실이, 엉뚱한 것에 시발점을 두고 마침내 불이 지펴진 오늘.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재영도, 열애설도, 소속사도, 대중의 사랑도 아닌 장그래, 그의 사랑이었다. 이대로 지속된다면, 언제 오늘처럼, 아니 오늘보다 훨씬 더 세게 터질지 모르는 일. 어느새 석율도, 그래도 모르는 새 시작된 이 쓰라린 저울질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백기도,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나는..., 


"아뇨.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장 선생님, 아니 그래씨는.. 충분히 욕심내고 싶을만한 사람이니까" 


형을 응원할래요. 형의 그 올곧은 사랑을, 믿어볼래요. 




그제야 대본에서 시선을 거두고, 백기와 눈을 맞춰 온 석율이 희미하게나마 웃었다. 장백기. 네? 

"아무리 그래도 우리 그래는 안돼. 내꺼야" 
"아, 형!" 

발끈하는 백기의 표정에, 석율이 몇 시간만에야 크크큭, 하하하 하며 소리내어 웃었다. 길고 긴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과장님, 저 괜찮습니다" 
"시끄러. 너 어디 닥터가, 환자 앞에서 픽픽 쓰러지래? 잔말 말아. 오늘부터 주말까지는 휴가야. 내과 병동, 의국에서 장 선생 봤다고 하기만 해 아주. 싸그리 다 당직이야. 알아들 들었지?" 
"넵" 

"...그게 제가 잠을 좀 설쳐서 그렇지, 이제 정말" 
"어쭈? 어디 2년차가 과장 앞에서 오더를 맘대로 내려? 못들었어? 수면부족이 아니라 영양실조라니까?" 



의국에서 잠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나보니 의국이 아니라 병실이었고. 의사 가운이 아니라 환자복을 입은 채였다. 발견한 동기 말로는, 뺨까지 때리면서 불러도 정신을 못차리는 상태였다는데, 수액에 영양제까지 맞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좀 개운해지기도 한 그래는, 그 와중에도 환자들의 상태를 물었고, 급기야 오상식 내과 과장님까지 내려오셔서는 엄포를 놓기에 이르렀다. 지금 환자라도 안보면 제가 정말 정신줄을 잡고 있기가 버겁단 말입니다,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입을 다물자, 그것이 긍정의 뜻이라고 생각하신 과장님은 두 번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쿨하게 병실을 빠져 나가셨다. 한석율도 없는데, 연락도 안되는데. 휴가면 뭐합니까. 불만이 가득 담긴 그래가, 한숨을 포옥 내쉬며 약이 다 들어간 수액 주사바늘을 빼냈다. 


석율과는, 그 이후로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금지당한 핸드폰이야 차치하고라도, 연락망이 되어줄 백기마저 다시 시작된 석율의 영화촬영 스케쥴에 쉴새없이 바쁜 모양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제 목소리가 석율에게 힘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 뻔히 보이는데, 이러나 저러나 마음을 어지럽히기만 할 듯했다. 그렇대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져버릴 순 없어, 다시 휴대폰을 확인해보지만, 역시나, 기록은 깨끗했다. 












"그래 씨" 
"..어? 대표님" 


난데없는 해준의 등장에, 그래가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꼿꼿한 인사에, 머쓱해진 해준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여, 여긴 어떻게.., 버벅이던 그래가 곧 아- 하며 깨달았다. 가족이 없는 장그래 선생의 비상 연락망 3번, 강해준. 1번 한석율, 2번 장백기도 연락이 안 되었을 타이밍이었다. 






"미안해요" 
"아뇨. 제가 죄송하죠. 지금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으실텐데. 괜히 저까지" 


해준이 사 온 오렌지 쥬스 한병씩을 들고 휴게실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첫마디는 사과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내뱉지 않아도 자연스레 맴도는 이름, 한석율이 있었다. 




"... 석율이가, 왜 그 많은 회사를 두고 우리 회사에 왔는지, 알고 있죠?" 
"...네.." 



석율이 계약 하기 전, 해준의 회사는 그리 큰 기획사가 아니었었다. 한석율의 성장에 따라, 회사도 함께 성장했다는 말이 있을만큼, 사람들은 그때의 석율의 선택을 의아해했었다. 허나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인정해주는 회사. 연애나 사생활에 관련해서 조종하지 않는 회사라는 점.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해준과 백기의 관계가, 석율이 계약서에 싸인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했다. 물론, 그래는 아주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뭐든, 막아주겠다고 했었는데. 이런 자잘한 일들조차, 힘이 없네요, 아직은" 
"이해해요. 그 사람, 아직 자기가 얼마나 유명한지 모르잖아요" 
"...." 


앞으로 비일비재할 일들. 그 속에서 오롯이 상처받을 한 사람이 그래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한번쯤 겪게 되서 다행이라 해야 할까. 해준은 차마, 괜찮겠어요, 라고 묻지 못했다. 그리고 망설이는 해준 대신, 그래가 먼저 그를 불렀다. 대표님. 네. 



".. 대표님도, 제 욕심이 과하다고 생각하세요?" 


내내 오렌지 쥬스 병만 쳐다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맞물렸다. 누가봐도 핼쓱해진 얼굴에서도, 유독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 한석율이 왜 장그래를, 이라는 질문보다 장그래가 드디어 한석율을, 이라는 질문이 어울리는 그 깊은 눈빛에 해준이 잠시 멍해졌다. 자랑스럽게, 너무도 자랑스럽게, 형. 내 애인. 하면서 소개를 받던 날. 수 백가지의 의문은 마침표가 되고, 걱정일랑 사라지던 둘의 예쁜 모습을, 해준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을 보면서, 백기에게 더 많이 표현하는 법을 배웠고, 오롯한 진심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뇨. 난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한석율은 멋진 배우이기 이전에 충분히 사랑할 만한 사람이잖아요" 


믿어보고 싶습니다. 내가 보았던, 그 예쁜 모습을. 




그제야 환하게 웃어보이는 그래의 모습에, 해준이 잠시 망설이다 수트 안쪽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래에게 내밀었다. 아까 들으니까, 마침 휴가라던데 잘 됐네요. 


"대표님...," 
"열애설 막아주지 못한, 능력 부족 대표가 주는, 사과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줘요" 
"...저, 지금은 제가 가는게..," 

"배우 한석율은 한달간의 영화 촬영 후, 빡빡했던 스케쥴과 누적된 피로로 인해 잠시 컨디션 난조가 올 겁니다. 그의 소속사는 배우의 회복과 안정을 위해, 며칠간의 휴가를 주고 의료진을 투입할까해요. 물론, 외부인의 출입을 꺼려하는 배우님을 위해, 그의 오랜 친구인, 장그래 선생으로" 
".... 대표님" 

"혹시라도 파파라치컷이 나오면, 소속사 입장은 그럴거에요" 
"...." 


"아. 그 의사 선생님께서, 과거 한석율을 도와 매니저 역할을 하셨던 적도 있으시다기에, 저희 회사 쪽 장백기 실장은 이만 한국으로 불러들일까 합니다. 아, 사실은 그의 애인도, 꽤나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주말까지 배우 한석율 옆에는 아마, 주치의이자 친구인 장그래 선생 뿐일겁니다. 해준이 웃었고, 그래의 손에는 비행기 티켓이 들려 있었다. 












"으음.., 아으.. 장백기이.., 너 왜 여기와서 자..." 

잠결에 몸을 돌려 뒤척이던 석율이, 등 뒤에 다가온 묵직함에 투정 섞인 목소리로 잠꼬대를 했다. 대충 손을 뻗어 제 허리에 엉킨 그 팔을 떼어내려는데, 그럴수록 더욱 딱 달라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석율이 살풋 찡그리며 눈을 뜨려는데.., 




"움직이지마요... 주사 들어가고 있어" 


ㅡ!! 




"그, 그래야? 정말 그래야? 응?" 
"한 달이 길긴 긴가보네. 날 백기씨로 착각도 하고. 설마 한달동안 둘이 이렇게 잤어요?" 
"무슨 소리야! 아냐!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렇지. 너 언제 왔어, 응? 그래야 일단 이 팔 좀" 


몸을 돌려 얼굴을 확인하려는 석율을, 좀 더 단단히 끌어안은 그래가 등 뒤로 제 얼굴을 묻어왔다. 그리고 곧, 미미하게나마 젖어가는 제 셔츠가 느껴졌다. 그래야아. 얼굴 보여줘. 응? 석율의 애원에도 그래는 작게 도리질만 했다. 싫어. 나 지금 좀 엉망이라, 잠깐만요. 팔에는 주사가 꽂혀있고, 허릿께엔 그래의 팔이 엉켜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석율이, 얼른 주사바늘을 뽑아버렸다. 아, 뭐하는거에요오. 순식간에 마주 돌아 누운 석율때문에 얼른 얼굴부터 가려버린 그래의 팔을, 석율이 조심스레 잡아 내렸다. 


핼쓱해진 그래의 얼굴에 한 번, 새카맣게 그을리고 살도 많이 빠져버린 석율의 얼굴에 한 번, 서로는 그렇게 쓰린 마음을 대신해 말없이 눈을 맞췄다. 한동안 그리 말없이 바라보던 두 사람은 어느새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단채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서로를 안았다. 




"...내 만병통치약이 왔는데, 주사가 왠말이야" 



"왜 이렇게 말랐어요. 내가 밥 열심히 챙겨 먹으라고 했잖아" 
"누가 할소리. 얼마나 아팠던거야, 왜이래 얼굴이" 
"그러엄. 내 애인 얼굴이 다른 여자 사진 옆에서 실시간으로 도배가 되는데. 멀쩡할리 있어요? 어디서는 기정 사실화 됐더라구요. 동반 출국에, 여기서 살 집 알아본다던데?" 
"장그래에" 


"라고 하길래, 내꺼 도장 찍으러 왔어요" 



그래가 품에서 살짝 빠져나와, 석율을 보고 웃어보였다. 여전히 눈동자엔 물기가 서려있었고, 피로는 쉬이 걷어지지 않은채였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해사한 미소였다. 
  



"도장 꾹" 

그래가 입술을 예쁘게 모아, 석율의 입술에 꾸욱, 정말 도장을 찍듯 눌렀다. 그 온기에, 잠시 눈을 감았던 석율이, 그래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잡아, 조금 더 자신에게 밀착시켰다. 하아, 석율의 힘에 의해 탄식하듯 나온 신음에, 마침내 석율의 혀가 그래의 혀와 만났다. 한달만의 만남을 키스로 다 채우기라도 하려는 듯, 석율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그 어디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깊은 입맞춤에, 그래가 숨 쉬기가 버거워져 결국 석율의 어깨를 살짝 쥐었더니, 그제야 입술이 아쉬운 듯 틈을 내어준다. 




"이런게 기사가 나가야 되는데" 
"이런게 진짠데" 



동시에 터져 나온 한마디에, 그래와 석율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서로의 품에도, 눈빛에도, 그리고 마음에도, 서로만이 가득한 순간에, 







스캔들이 아닌 배우 한석율의 진짜 열애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누가 뭐라든, 언제 어떻게 되든 그것은 다 나중 일. 
지금은, 서로가 믿는 오직 한 가지. 
마음이 말해주는 진실. 








사랑이니까. 














짧은 엔딩과 사족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이나 피드백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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