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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단편

[석율그래] 아낌없이 주는 나무


- 다른 작가님들과 함께 존샨필모 동화합작에 참여했습니다. 첫 합작이고 부족한 실력이 여과없이 드러났지만, 참가에 의의를 두는 마음으로 기쁘게 함께 했으니 여기 클릭 하셔서 다른 분들의 작품도 많이 감상해주세요


-BGM이 있는데 티톨엔 도무지 어떻게 첨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여기 를 클릭하셔서 들으시면서 감상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ㅜ_ㅜ (이기찬-춤추는 나무)


-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여러분 항상 감사합니다


















“ 한석율. 일어나 “

“ 으응. 그래야아. 5분만 “

“ 하나아 - “

“ 으아. 장그래 씨야! 진짜! “

“ 하나 셀 때마다 5 천원 씩 깎는다. 하나 “

“ 네 맘대로 해라, 장그래 “

“ 두울. 만원이네 “

“ 만…, 하아. 나 일어났어. 일어났다고. “

 

스프링처럼 풀썩 침대 위에서 튀어 올라 무릎을 꿇고 앉은 석율은 여전히 눈도 다 뜨지 못한 상태로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장그래, 너 내가 어제 몇 시에 들어온 줄 알잖아. 거래처 술자리가 무려 두 시에 끝이 났다고. 하며 뭉개지는 발음으로 열심히 항변을 하던 석율을 바라보는 그래의 얼굴에는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곧 다시 슬금슬금 베개 쪽으로 머리가 기울던 석율을 보던 그래는 자세를 고쳐 잡고 짐짓 단호한 표정이 되었다. 이윽고 그래의 입을 통해 나온 한마디에, 석율은 또 다시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욕실로 향했다.

 

“ 5분. 빨리 씻고 나와서 된장찌개 끓이는 법 배워. 꾸물대면 이번엔 만 원 깎는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

Written by shp(@shp_joy)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미생 한석율x미생 장그래

 

 

 

“ 자, 이렇게 멸치 국물이 우러 나오면 멸치를 건지고. 이제 된장을 풀어야 하는거야. 거기 된장 좀 퍼 줘 “

“ 하아음. 이만크음? “

“ 그건 너무 많잖아. 한석율 씨. 눈 똑바로 안 뜹니까? 집중 하랬잖아. 이러다 회사 늦어 “

“ 아, 그래야. 그러니까 난 이걸 내가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

 

연신 하품만 해대는 석율을 못마땅한듯 바라보던 그래의 목소리가 한 톤은 더 낮아졌다. 이에 질세라 석율 역시 대충 대충 된장을 퍼 담던 숟가락을 내려 놓고 불평 가득한 목소리로 툴툴 대는 모습에 그래가 한숨을 포옥 내 쉬었다.

 

“ 네가 쭉 하던 일이었잖아.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네가 하는 게 더 편하다고 나 손도 못대게 했잖아 “

“ 그래 “

“ 그래! 장그래. 네가 그런 거잖아. 근데 이제 와서 왜 이래? 너 어디 갈 거야? “

 

장그래, 너 진짜 이상한 것 알아?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입을 이리저리 삐죽이던 석율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래의 눈동자는 아무 의미 없이 던진 석율의 한마디에 의해 사정 없이 흔들렸다. 무어라 대답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은 그래가 망설이는 순간 알 수 없는 정적이, 이상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자 석율 역시 입으로 푸푸 숨을 내쉬며 마구 헝클어트리던 앞머리를 정돈하고 그래와 시선을 맞춰 왔다. 장그래? 의아함이 잔뜩 밴 석율의 목소리에 그래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 내가 어디 갈 게 아니라 네가 갈 거잖아 “

“ 뭐? 내가 어딜 가 “

“ 서연 씨랑 결혼 하고 싶다면서. 요즘은 요리 못하는 신랑 매력 없어 “

 

그래의 한마디에 기상 이후 한 번도 다물어지지 않았던 석율의 입술이 한 일자를 그렸다. 그저 마악 끓어 오르기 시작하는 된장찌개만이 보글보글 일정한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오늘 찌개는 좀 짜겠다, 너 때문에. 그래는 있는 힘을 다해 겨우 웃었다.

 

 

 

 

- 어머, 아이구 석율아.

- 왜에. 시러어. 석유리꺼야아. 흐아아앙

- 석율이 것 아니야. 이건 그래 꺼야, 석율아. 그래야, 미안해?

- 우음..., 자아.

- 어머, 그래야 석율이 이거 주는거야? 석율아, 그래야 고마워 해야지

- 흡, 그래, 끅, 고마워어.

 

아마 그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서로의 기억에는 없지만 석율의 어머님이 전해 주신 이야기였다. 석율에게 장난감을 빼앗기고도 울지 않았던 그래와 외려 그것이 석율의 것인냥 다시 장난감을 건네 주던 그래의 손을 석율이 꼬옥 잡았었다고 하셨다. 말이 겨우 트였을 무렵, 누구의 가르침이 아니라 본능적인 이끌림으로 이루어 졌던 일. 그렇게 두 개의 고사리손이 맞닿은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었다. 그리고, 그 또한 그 때 부터였다. 한 아이의 작은 콩닥거림 속에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렸던 것은.

 

 

- 장그래, 수학 숙제 했어? 야, 나 이거 15번 문제 있잖…,

- 야. 너 누가 우리 그래 책상 앞에 있으래. 빨리 안 사라져?

- 야, 한석율. 너야 말로 치사하다. 너도 그래 숙제 베끼러 온 거잖아! "

- 쓰읍. 빨리 꺼져라아? 그래야아, 짱그래. 이거 먹어, 바나나 우유랑 너 좋아하는 빵

- 넌 몇 번 문제 모르는데?

- 흐흥, 아휴. 또 우리 그래가 알려준다면 내가 마다할 수가 없지. 그래야, 나는 10번-

- 허, 야 한석율.

- 시끄러워. 너희들 내가 우리 그래 숙제로 괴롭히지 말랬지? 하루 이틀 하는 이야기도 아닌데 좀 알아 들어라, 이제. 그래야, 체한다. 우유 쭉, 쭉. 옳지.

 

석율의 말대로 하루 이틀 일이 아니어서 더욱 그랬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어디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그 때의 순간부터 한석율은 장그래의 옆에 있어서, 더욱 그랬다. 코로 숨을 들이 마시고, 그 안에 산소분자가 가득해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처음부터 알게 되는 것인 것처럼, 그렇게 기억이 자리하는 순간부터 한석율은 장그래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함께였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 장그래, 할 말이 뭔데 이렇게 은밀하게 불렀어, 응? 우리 그래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기가 힘들었어요오?

- 너도 할 말 있다며.

- 응. 나 있지이. 근데 우리 장그래 얘기 먼저 들을래. 뭔데?

- 있지, 한석율. 그러니까 내가 널…,

- 응?

- 아, 후우, 아냐. 너 먼저 말해. 듣고 말할게.

- 흠, 그래? 나 말야. 5반 유영은이랑 사귀기로 했다! 걔가 좀 부끄러워 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는데. 우리 장그래는 나한테 아무나가 아니니까. 하하. 좋겠지!

- 응? 어어. 그래…, 추, 축하해.

- 넌 무슨 말 하려고? 빨리 해봐. 흐흥, 이 엉아가 다~ 들어줄게.

- 엉아는 무슨. 내가 너보다 생일 빨라. 가자, 집에.

 

당연하게도, 그가 좋아지게 된 것이라고 그래는 생각했었다. 빗물에 젖어 가는 옷이 그렇듯이, 물감에 물들어가는 하얀 도화지가 그렇듯이 스며 들었었다. 그리고 한석율도 장그래를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에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래는 당혹스러웠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이, 어느 누군가에겐 생각도 못 해 본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왜 그 때는 한 번 더 생각 해보지 않았을까.

 

살풋 떨리는 목소리를 감춘 채 평소처럼 집에 가자 말하는 그래에게, 역시 평소처럼 어깨 동무를 하던 석율을, 그래는 그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고작 열 아홉. 뿌리 깊이 심어진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 마음의 시작을 모르기에 끝 조차 내지 못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기에 돌아갈 수 조차 없던 그 길에는 정지 표시도 유턴 신호도 존재 하지 않았다. 고작 열 아홉의 장그래가 할 수 있는 것은, 요동치는 마음을 부여잡고 친구라고 말하며 내밀어진 그의 손을 위태롭게 붙잡고 서 있는 것. 그 뿐이었다.

 

 

 

 

“ 오늘 늦어? “

“ 아니. 오늘도 늦게 가라고 하면 진짜 내가 성 대리 죽여 버…, “

“ 말 좀 “

“ 안 늦어. 서연이도 요즘 바쁜가봐. 왜? 우리 오랜만에 데이트 할까, 장그래? “

“ 아휴, 쫌. 됐다, 한석율. 내려 얼른. 그럼 오늘도 수고 “

“ 야, 우리 정말 계속 이렇게까지 해야 해? “

“ 또 그 소리입니까, 한석율 씨? “

 

어느새 바뀌어 버린 그래의 말투에 석율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회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멈춰 선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는 석율의 뒷모습은 흡사 아침에 보았던 소년과도 같은 모습이라 그래 또한 고개를 내젓고야 말았다.

 

 

 

서로 다른 대학에 입학 해 처음으로 같은 학교가 아닌 곳에서 각자의 생소한 일상을 보내고, 순서대로 군대를 다녀 오는 동안 두 사람은 부득이하게 연락이 끊겼었다. 부모님들은 계속 서로 연락을 취하시는 듯 했지만 그 날의 전하지 못한 고백 이후 그래는 조금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한 동안은, 그렇게 살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족쇄 같이 묶여 있던 한석율이라는 존재를, 그 마음의 뿌리를 조금은 거두어 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헌데,

 

- 장그래 씨? 반가워요. 섬유 1팀 인턴 한석율 입니다.

- 한…,

 

- 잘 있었어, 장그래?

 

반듯한 정장에 조금 우스꽝스러운 머리를 하고 나타난 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래는 인정해야 했다. 다시, 족쇄가 채워졌음을. 다시, 마음 속 깊이 숨겨둔 나무가 자라고 있음을. 다시, 마음이 쿵쾅쿵쾅 요동치고 있음을.  

 

 

 

 

“ 삐쳤어요, 한석율 씨? “

“ 야, 내가 무슨…!, 삐치긴요, 장그래 씨 “

“ 말했잖아. 나 학연, 지연 이런거 좀 별로야 “

“ 암요. 예. 그럼요. 기저귀 찰 때부터 친구여도, 안 될 말이죠. 예. “

“ 야, 한석율. 뭘 또 그렇게까지 “

“ 흠…., 미안하면 나 용돈 2 만원만 올려주라 “

“ 내린다. 올라 가세요, 한석율 씨 “

“ 야, 요즘 물가가 얼마고 나 데이트도 해야 하는, “

 

엘리베이터의 문이 인정사정 없이 굳게 닫혀 버리는 와중에도 수고해 하며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려 내는 석율 덕분에 내내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던 그래의 낯빛에 옅게 나마 미소가 번졌다.

 

 

처음부터 숨기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인턴 PT 때 서로 파트너가 되면서 밝히기가 꺼려졌었다. 자칫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말을 들을 것도 같았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그래와 파트너가 된 사실이 석율에게 이득 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때에도 그래는, 자연스레 석율을 먼저 생각 했었다. 석율에게 용돈을 주게 된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석율의 부모님이 뭐든 퍼 주기 좋아하는 아들이 씀씀이를 걱정 하셨고, 그 즈음 함께 살게 되었던 그래가 석율의 지갑을 관리하게 되었다.

 

 

 

“ 그러지 말 걸…, “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의 문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그래가 허공에 흩날리는 공기 중에 낮게 제 한숨 소리와 씁쓸한 말들을 섞었다. 그의 일상 속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가깝게 스며 든다는 것이, 함께 한다는 것이 이제 와서는 이렇게 후회 되는 일일 줄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의 삶은 그가 사는대로 내버려 두었어야 했었다.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걱정할 일도, 이렇게까지 애처로울 일도, 또 이렇게까지 슬플 일도 없었을 텐데.

 

복도를 지나 자리로 걸어가는 그래의 발걸음은 또 다시 가시밭길을 걷는 이의 그것처럼 무겁게 내려 앉았다.

 

 

 

 

“ 그래 불러 줘어어요오오, 장그래에에!! “

“ 아이, 참. 한석율 씨. 조용히 해요. 사람들이 다 쳐다 봐요 “

“ 집에, 집에 갑시다 한석율 씨. 네? 제발 “

“ 그래랑 갈거야아아아, 백기 쒸이, 우리 그래 왔어요오오? “

“ 거 참 장그래 씨가 오기 전에 제가 미치.., 어, 장그래 씨! 여기요! “

 

붐빌 시간이 훌쩍 지나 사람도 몇 명 앉아 있지 않은 테이블에 영이와 백기를 앞에 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석율은 이미 목 끝까지 붉게 달아 오른 화롯불이 되어 제 몸 하나 가누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또렷하게 걸어 들어 왔지만 벌개진 귀 끝을 숨기지는 못했다. 한석율 씨 언제부터 이랬어요? 조심스레 백기와 영이에게 묻는 그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 여자 친구랑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말릴 새도 없이 처음부터 취해버려서…, “

“ 그래 씨만 찾던데. 장그래 씨 한석율 씨 집 알아요? “

“ 네? 아…, 네. 제가 알아요. 두 분 감사합니다. 얼른 들어가 보셔야죠. 한석율 씨 제가 데려다 줄게요 “

“ 근데 그래 씨 뛰어 왔어요? 아니 어디 아파요? 땀이…, “

“ 아니에요. 저 먼저 가볼게요. 한석율 씨, 일어나요 “

“ 으응? 어, 그래다. 그래야아아아 “

“ 일어나 한석율 “

 

비틀대는 석율을 조심스레 일으키고 그의 한쪽 팔을 제 목에 두르고 단단히 허리를 잡아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 모두, 이전에도 여러번 해 본 사람처럼 익숙하게 물 흐르듯 거리낌이 없는 그래의 모습에 백기와 영이는 도와 주는 것도 잊고 멍하니 바라 볼 뿐이었다. 두 사람이 원래 저렇게까지 친했던가. 말도 놓았었나. 수 많은 생각이 스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리둥절하며 백기가 그제야 깨닫고는 부축을 도와주려 하자, 그래가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을 표했다. 그것이 마치, 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견고한 철벽 같아서 백기와 영이 중 누구도 쉽사리 그래의 곁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가자, 석율아. 하는 그래의 얼굴의 서린 단호함은, 예의 친한 직장 동료의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 한석율…, 후우. 좀 똑바로 걸..어봐…, 힘, 들다 “

“ 그래야아...! 그래야아아아…! “

“ 그래. 네가 애타게 찾는 장그래 여기 있잖아. 대체 뭐 때문이야. 서연 씨랑 싸웠어? “

“ 흐윽…, 그래야아…, “

“ 야. 야 너 울어? 한석율. 왜 이래, 응? “

“ 후우…, 서, 연이가…, 그래야, 서연이가…, 헤어지재 “

“ 뭐? “

 

비틀대는 제 몸보다 훨씬 더 떨리고 있던 석율의 목소리가 기어이 한 마디를 전하자 힘겹게 그를 지탱해서 걸어 가던 그래가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뭐라고 했어, 지금. 되물었지만 되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이미 석율의 눈에서 뜨겁게 흐르는 눈물 줄기가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웃음이 먼저인 석율이었고, 그를 모를리 없던 그래였다. 그런 그가 울고 있었고, 석율을 지켜 보던 그래도 또 한 번 마음이 수천 갈래로 찢겨졌다. 그리고 오늘은 열 아홉의 그 날 보다, 훨씬 더 아팠다.

 

 

“ 근데 그래야아 “

“ …… 응 “

“ 지그음 비 와아? 너 왜 이렇게 젖었어어? “

 

마음도 몸도 흠뻑 젖은 그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비틀비틀, 그래의 부축을 벗어난 석율의 다리가 흔들렸고. 비틀비틀, 그래의 세상이 온통 안개 낀 창문처럼 흐릿해졌다.

 

 

 

 

 

 

 

“ 으윽…, “

“ 휴, 옷 벗고 자야지. 석율아, 한석율? “

“ 흐윽…, 하…, 그래야아 “

 

평소라면 택시에서 내려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나 이제 이런 것 마저도 힘에 부치는 건가. 너 인마, 이제 이렇게 술 취해서 나 찾으면 안돼. 당혹감도 서러움도, 그리고 안타까움도 한데 엉킨 그래의 표정이 복잡했다. 침대에 눕혀 놓은 석율은 여전히 횡설수설하며 간간히 울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아침에 그래가 손수 골라 주었던 넥타이의 구겨진 매듭을 조심스레 풀어내는 그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네이비 컬러에 자수로 새겨진 물결 무늬가 넘실대는 파도인냥 자꾸만 울렁인다. 고개를 세차게 두 어번 흔들고 나서도 여전히 그래의 시야는 뿌옇게 앞을 가렸다.

 

 

톡-

 

“ 이서연, 어떻게.., “

 

셔츠의 단추가 하나씩 둔탁한 소리를 내며 풀어질때마다, 알싸한 알콜 내음에 섞인 석율의 흐느낌이 흐르고 흘러 그래의 마음에 닿아왔다. 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다시 빠르게 손을 움직인 그래가,

 

 

다시 톡 –

 

“ 네가 나한테 이래…, “

 

부러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덤덤히 석율의 옷가지를 벗겨 내고 있었지만 결국 그래의 눈에서도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방울방울 흘러 얼굴을 뒤덮었다. 석율의 원망은 오롯이 서연을 향해 있었지만 후두둑 떨어지는 그래의 눈물은 오롯이 석율의 왼쪽 가슴에 소낙비처럼 떨어졌다.

 

 

 

 

 

 

괜찮을 리 없는 그래의 손이 한참을 헛 손질 하던 그 때,

 

ㅡ!!

 

 

불쑥 튀어 나온 석율의 손이 허공에서 버둥거리다 그래의 손목을 낚아 챘다. 그렇게 풀썩, 석율의 위로 쓰러지듯 기댄 그래의 머릿칼을 술 기운이 완연한 석율이 쓰다듬었다. 울지마. 누구에게인지 모를, 그리도 다정한 목소리에 그래의 울음 소리가 자꾸만 커져갔다. 쿵쾅쿵쾅. 규칙적으로 뛰는 석율의 심장 소리는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큰 위로였다.

 

 

“ 울지 말래도…, “

 

그래서였다. 그 언젠가 꼬옥 맞잡았던 작은 두 손이 주던 따뜻함이 기억났었고 석율이 지닌 알콜의 향은 온데간데 없이 달큰한 향이 퍼져 왔기에. 무엇보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오지 못할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한석율, 그러니까 절대 기억하지 마.

 

 

그래의 입술이 석율의 입술을 찾아 들었다. 어느새 어두움이 가득 내려앉은 밤, 새벽의 쓸쓸함이 온 방안을 채운 그 밤, 눈물로 얼룩진 두 사람의 얼굴은 분간할 수 없을만큼 젖어 있었지만 그래는 조심스레 감싸 쥔 석율의 두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고 눈물의 짠내가 가득한 그 입술과 제 입술을 빈틈없이 머금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죄책감은 마지막이라는 변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 장난감을 석율의 손에 쥐어주었던 것처럼 누구의 가르침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본능적 이끌림으로 이루어진 입맞춤에는 숨 쉴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먼저 탐하고도 쉬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던 그래를 이끈 것은 석율이었다. 깊게 맞물린 입술을 혀 끝으로 톡 하고 건드리는 순간 아-, 탄성인지 감탄인지 아니면 한숨인지 알 수 없는 그래의 외마디 신음에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의 혀가 엉켰다. 마음에 뿌리 내린 나무가 심어진 뒤에도, 감히 상상으로라도 해 보지 못했던 일. 바삭하게 메마른 나뭇잎이 버석거릴 지언정, 결코 욕심 낼 수 없었던 일. 현실보다도 훨씬 더 꿈만 같고 꿈 보다도 훨씬 더 현실 같은 그 순간, 그래는 이대로 정신을 놓아버릴 듯 했다. 그런데,

 

 

“ 서연아… “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그 이름자가 석율의 입술을 통해 나오던 그 때, 멈춰져 있던 시계가 흐름과 동시에 그래의 꿈도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꿈결인듯 맞물리던 달콤함도 그제야 끝이었다.

 

도망치듯 석율의 방에서 빠져 나온 그래는,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 흐윽… “

 

마지막이니까. 다시 없을 일이니까 괜찮아. 애써 제 자신을 다독여 보지만, 석율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터진 울음이 쉬이 그쳐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얇은 티셔츠 사이로 앙상하게 남아버린 그래의 웅크린 어깨는 겨울 날 말라버린 가지보다도 초라했다. 그의 뒤로 힘겹게 떠오른 붉은 태양이 또 다른 시작을 알렸다. 나 아직, 살아있구나. 이렇게 바닥까지 드러내고도 나 아직, 살아있구나. 한참을 그리 울다 지친 그래는 일출의 빛이 발끝을 간지럽히는 것이 느껴지고 나서야 조용히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섰다. 후우. 장그래. 잊어 버리자. 너한테 지금, 이럴 시간 없잖아.

 

 

 

“ 한석율. 일어나 “

“ 으응. 장그래? 나 어제 어떻게 왔어? “

“ 하나아 – “

 

그렇게 또 다시, 아침이었다.

 

 

 

 

 

 

“ 캬, 야 죽인다. 그치? 와, 이게 되네? “

“ 거 봐. 하면 된다니까. 이제 나 없어도 찌개는 끓여 먹겠네. 아, 그리고 이건 네 통장이랑 카드 “

“ 이거 뭐. 나, 나 준다고? 왜? “

“ 네 꺼니까 “

“ 야, 언제는 내 꺼가 아니라서 네가 갖고 있었냐. 너 왜 이래 “

“ 그 정도는 돌려줘도 될 것 같아서. 아버님께도 말씀 드렸어 “

“ 쓰읍. 너 요즘 이상하다? 어디 갈 것 처럼. 매일 왜 그래? “

“ 응. 나 가려고 “

“ 뭐? “

“ 나. 이 집 나가려고. 나 다른 집 계약했어, 한석율 “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보이고 싶었다. 마치 이제 두부 더 넣어야지, 하는 어투의 그래를 석율은 모든 사고의 회로가 멈춘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그런 석율의 시선을 애써 회피한 그래가 마지막으로 수저를 내려 놓으며 방으로 향했고, 그런 그래를 석율의 엉키는 발걸음이 뒤 따랐다.

 

 

“ 다시 말해봐. 어딜 간다고? “

 

급하게 석율에게 팔을 잡혀 미처 나아가지 못한 그래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여기서 돌아 보면 안돼, 장그래. 굳이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석율의 흔들리는 눈빛이 느껴졌다. 그래는 속으로 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수 백 번 연습한 그대로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 나갈 거야. 막말로 우리 둘 가족도 아닌데. 아니 가족이라도 불편한 일인걸 왜 같이 살아. 너도 내가 없어야 서연 씨든 누구든 더 자유롭게 만날거고. 나도…, 그렇고 “

“ 너 여자 생겼어? “

“ ……. “

 

“ 나, 그 날 술 먹고 잔뜩 취한 날. 서연이랑 헤어졌던 그 날. 너한테 뭐 실수, 했냐? “

 

확신은 없지만 무언가 걸리는 일이 있어 그랬을까. 잔뜩 불안을 머금은 석율의 목소리가 흔들렸고, 그 때문인지 그래를 잡은 손에는 힘이 풀려 있었지만 그래는 그 맞닿은 한자락을 뿌리치지 못했다. 아니, 뿌리칠 수 없었다. 큰 일이야. 아직은…,

 

“ 그런, 거, 아냐 “

“ 야, 장그래 “

“ 좀 놔 ㅈ…, “

 

“ 그래야!!!!!! 그래야, 장그래 정신차려. 그래야? “

 

아직은 안 되는데. 그렇지, 석율아? 석율의 품에서 마구 흔들리는 그래는 미동이 없었다. 시계는 다시 멈춘 듯 고요했고 방 안을 울리는 것은 오로지 절규에 가까운 석율의 외침 뿐이었다.

 

 

 

 

 

 

 

“ 말도 안돼요. 말이, 안 되잖아요 선생님. 어떻게 “

“ 죄송합니다. 이미 발견 했을 때 너무, 많이 늦었어요 “

“ 저!.., 저 녀석이랑 저, 같이 살아요. 회사도 같이 다녀요. 저희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몰라요! 장그래가 아픈데 어떻게…! “

“ 현재로서는 치료가 무의미해요. 환자 분도 잘 알고 계시고요. 되도록이면 스트레스 받는 일 없이 마지막,”

“ 씨발. 누가 누구더러 마지막이래 지금!!!!! “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석율의 그런 반응에도 앞에 앉은 의사는 흔들림이 없었다. 으레 보호자들에게서 보게 되는 반응인 듯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지금 석율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위암이니, 마지막이니 하는 단어들. 그런 것들은 아직, 들으면 안되는 단어였다. 특히 그것이 장그래를 향해 있을 때는 더더욱, 안되는 말이었다.

 

 

“ 그만해, 석율아 “

“ 장그래. 너 이 새끼야…, “

 

그렇게 박차고 나간 진료실 밖에 서 있었던 것은, 그래였다. 퉁퉁 부어 오른 석율의 눈가를 매만지는 팔 끝에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주사 바늘이 벌써 여러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는 웃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 하는 장그래의 그 비어 버린 웃음에 석율은 또 한 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 한석율…, 회사 가야지. 반차만 냈다고 하지 않았어? “

“ 미친 새끼. 장그래 이 나쁜 새끼야! “

“ 그럴 필요 없어. 난 괜찮아 “

 

이렇게 보니 군데 군데 뼈가 두드러질 정도로 앙상한 그래였다. 왜 이 모습을 이제야 알았을까. 이상하다고 생각 했어야 했다. 제가 무슨 짓을 해도 곁에 있어 줄 것 같았던 그래가, 자꾸만 자신에게 혼자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다정하진 않았지만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던 그가 제게 무심하게 이야기 하던 것을 보면서 한 번쯤은 왜 그러느냐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그래가 오늘 늦냐며 할 말이 있음을 느꼈을 때,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그래가 저를 챙겨주는 것은 당연한 일들이라 생각했던 건 대체 언제부터 였을까. 자신의 것일지라도 석율이 필요 하다면 내어 주던 그래였다. 자신이 충족 시켜 주지 못할 때는 조용히 함께 머리를 맞대 주는 것을 주저 하지 않았었다. 그래의 잔소리 마저 한번도 귀찮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장그래는, 한석율에게 중한 존재였고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친구였다.

 

 

“ 난 어쩌라고 이러냐, 장그래 “

 

그저 언젠간 보답 할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장그래는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결국 창피함도 모르고 그래의 병원 침대 한 켠에 고개를 묻은 석율의 주위가 젖어 들었다. 하나도 안 컸다, 한석율. 흐릿한 미소를 지은 그래가 가만히 석율의 머릿칼을, 그의 너른 등을 쓰다듬었다. 울지마. 나 아직 안 죽었어. 그 한마디에, 석율이 떨리는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뜻이었다. 이거였구나. 계속해서 어딘가 기억나지 않았던 그 밤의 필름 한 조각이, 이거였구나. 꿈인 줄만 알았다. 현실이라기엔 너무 달콤해서, 현실이라기엔 너무 애틋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늘 지배적으로 한 켠에 남아 있었지만 너무도 덤덤한 그래의 모습에 그저 착각이라 여겼더랬다. 하지만,

 

 

“ 미안해 “

 

안타까움만이 가득한 녀석의, 장그래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것은 현실이었다. 내 마음 안에서 너를 자라게 해서 미안해. 그 뿌리를 거둬내지 못해서 미안해.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어서 미안해. 그래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그래야. 한 마디의 말도 오고 가지 않는 병실엔 두 사람의 20년이 훌쩍 넘는 그 세월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이 전해져 서로에게 닿았다.

 

 

 

 

 

“ 이제 그만 와, 석율아 “

“ 시끄러 “

 

무슨 대단한 프로젝트라도 하는 냥, 사과 하나를 들고 고군분투 하던 석율이 그래를 노려 보았다. 퇴근 후에, 그리고 출근 전에 석율이 머무는 곳은 늘 그래의 병실이었다. 그 때마다 대화도 같았다. 이제 그만 와. 하는 그래와 시끄러, 하며 들은 척도 안하는 석율. 그리고 그 끝에는 늘 알 듯 모를 듯한 그래의 장난기 어린 온화한 미소가 함께였다. 병원에서는, 그래가 버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석율은 그것이 저 때문임을 알았다. 한석율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 그것이  장그래가 끈을 놓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래, 뭐든 상관 없었다. 볼품 없는 모습으로 남아 눈만 깜빡여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더래도, 장그래가 제 곁에 존재 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제발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만 있어달라고, 석율은 순간 순간마다 빌고 또 빌었다.

 

 

 

“ 저기, 옆에 서랍 열어봐 석율아 “

“ 여기, 세번째? “

“ 응. 그 안에 있는 서류. 꺼내 봐 “

 

이제 자꾸만 숨이 거칠어지고, 기운이 없어지는 그래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겨우 쥐어 짜낸 한마디 한마디는 귀를 가까이 해야 겨우 들을 정도였다. 그래가 시키는대로 서류를 꺼내어 찬찬히 살펴 보던 석율이 놀란 듯 눈이 커지고 종이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려 왔다. 장그래, 마른 침이 꿀꺽 넘어 가며 겨우 그래를 부르자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 눈빛으로 많은 말을 대신했다. 이런 날이 올 것이란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반듯반듯한 종이에 꾹꾹 눌러 쓴 메모 한마디에 석율은 결국 무너지고야 말았다.

 

[네 용돈 관리 하면서 모은 돈이야. 그러니까 이건 다 네 거야. 이제, 나 없이도 할 수 있지, 한석율? 너무 퍼 주지만 말고, 내가 못다한 일들 너는 다 해봤으면 좋겠다. 내 몫까지, 열심히 살아줘. – 장그래 ]

 

 

 

“ 그리고, 석율아…, “

“ …… “

“ 나, 다른 장기는 전이가 너무 많이 되서 어렵지만, 각막은 이식이 가능하대 “

“ 장그래!! 너 기어이 내 앞에서! “

“ 그럼 내가 누구한테 이런 말을 해. 한석율, 들어 줄거지? “

 

후우, 숨을 크게 참은 석율이 가까스로 그래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고마워. 그 짧은 세 음절의 단어에도 호흡 속에 고통이 숨어 있는 그래는, 어렵사리 석율의 손을 꼬옥 잡았다. 우리는 시작부터 이런 친구였으니까. 잡은 손으로 말보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사이였으니까. 알아줘, 석율아.

 

 

“ 혹시라도 기증 받는 사람 알게 되면, 멀리서라도 한 번 확인 해 줘 “

“ 그래, 알았어 “

“ 꼬옥 “

“ 알았다니까. 잘, 있는지 확인 할게 “

“ 응. 그리고, 우리 아버지 엄마 계신 옆 자리에 내 자리 있어. 거기에…, “

“ 내가 그런것도 모를까봐서? 걱정 하지 마 “

“ 남길 것 같은 거 없어. 그냥 네가 알아서 다 태워 주거나 필요한 곳에 기증하면…, “

“ 장그래, 그만. 너 숨 차잖아. 힘들다. 자고 일어나서 해도 돼 “

 

그래와 시선을 나누지 못하고 애꿎은 이불만 재차 정리하는 석율을 보며 그래가 힘겹게 그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리고, 한석율. 석율아.

 

“나중에 하, “

 

그렁해진 눈을 들키기 싫어 부러 퉁명스레 대꾸하던 석율이, 아주 작지만 또렷하게 들려 온 그래의 한마디에 모든 것에 정지 버튼을 눌렀다. 흘러가는 시간까지도, 그 때는 멈춰야만 했으니까.

 

 

“입술은,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아 석율아 “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석율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래를 향해 다가갔다.

 

 

 

 

 

“ 흐읍.., 하아… 하…, “

“ 하, 그래야. 장그래…, “

 

두 사람의 입술이 뜨겁게 맞물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열린 틈새로 서로를 옭아 매기 시작했다. 단순한 키스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많은 감정이, 두 사람의 숨에 섞여 전해지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것이 한 쪽으로 기울어진 사랑이든, 연민이든 동정이든,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우정이든 그런건 지금 아무래도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온전히 모든 숨을 불어 넣어 그래에게 전해주고픈 석율이었다. 그의 마음을 조금 더 일찍 알아 차려 주지 못한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간 제가 모르는 시간동안 얼마나 많이 혼자 아파했을까. 왜, 한번도 너를 돌아보지 못했을까. 석율은 조금 더 깊게, 더욱 더 깊은 곳에 저를 새겨 넣었다.

 

장그래, 절대 잊지 마. 죽더라도 이건 잊으면 안돼.

잊지 말고 기억해두었다가, 나 찾아 와.

그 때에는…,

 

 

“ 나, 행복, 했, 어 석율아 “

 

꼭 전해주고 싶었던 한마디였다. 친구라는 이름이든, 짝사랑하는 사람이든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네 곁에 늘 함께할 수 있어서. 네가 의지하던 사람이 나라서.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나라서 늘 행복했었다. 내 마음과 상관 없이 너에게는 행복만 가득하길 바랬었는데. 슬픔을 안겨주는 사람이 결국 내가 될 것만 같아서 너무 미안하고, 서러웠다. 이제 제가 모르는 시간동안 얼마나 많이 혼자 아파 해야 할까. 왜, 끝까지 너에게 비밀일 수 없었을까. 그런데 나, 이기적이게도 지금, 너무 행복해서 너에게서 잊혀지고 싶지가 않아. 그래는 조금 더 깊게, 더욱 비밀스런 그 자리에 저를 새겨 넣었다.

 

 

응, 잊지 않을게. 죽더라도 이건 잊지 않을게.

멀리 가서도 늘 기억하다가, 꼭 너를 찾아갈게.

그 때에는…,

 

 

그 날의 병실에는 밤이 늦도록, 비가 내렸고 난생 처음 단비를 맞은 마음 속의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꽃을 피워 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은 마냥 슬프지 않았다. 아니, 그 어느때보다도 달콤했다.

 

 

 

 

 

“ 장그래, 잘 있었어? “

 

납골당 한 쪽에 자리한 새하얀 사진을 보던 석율이 조심스레 꽃다발을 그 앞에 내려 놓았다. 말끔한 정장에 까만 넥타이를 맨 석율은 한층 더 멋있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음이 한 눈에 보였다. 하지만 곧, 나 오늘 좀 멋지지 않냐? 하며 사진 속 그래에게 너스레를 떠는 모습은, 그래가 간직한 철부지 한석율의 모습이었다.

 

 

“ 네 덕분에 나 되게,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어 그래야 “

 

나 이제 김치찌개, 된장찌개 기가 막히게 잘 끓인다? 재테크도 잘 하고 있으니까 걱정마. 빨래, 청소. 야, 그건 원래부터 내가 너보다 좀 더 잘했어. 너도 인정하지? 그래야 나, 네가 관리해주었던 내 몫으로 작게나마 후원을 시작했어. 나 이제 곧 과장도 될 것 같아. 우리 신입들 중에 제일 빠를지도 모른대. 내가 장백기랑 안영이를 제쳤다? 대단하지? 성 과장은 여전해. 히스테리 부리고, 아랫 사람 좀 괴롭히긴 하는데. 이젠 그것도 요령이 생겨서인지 좀 귀엽기까지 하다. 아 참, 짜잔. 안영이 씨 결혼한대. 나더러 사회를 봐 달라고 하네.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서, 열심히 연구 중에 있어 요즘.

 

 

“ 장그래, 너는 어때? “

 

석율은 납골당을 걸어 나와 뒷 쪽에 마련된 곳에서 꽃다발과 함께 준비했던 맥주 한 캔을 따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 없으니까, 나 혼자 마시잖아 장그래. 거긴 어때. 어머님 아버님은 다 잘 계셔? 세 식구 오붓하게 봄소풍 나가니까 좋아? 너 인마, 너무 좋다고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는 것 아니지? 너무 춥거나, 너무 덥지는 않지? 거기서는 아픈 건 없는거지, 그래야? 우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하긴, 요즘 비가 잘 안 오는 것 보니 우리 장그래 엄청 행복한가보다 싶다.

 

 

그래야,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다.

 

 

 

 

 

 

 

“ 저기, 한석율 씨? “

“ 아. 네. 제가 한석율인데요 “

“ 납골당에서 손님이 기다리신다고 전해 달라셔서요 “

“ 아, 감사합니다”

 

- 혹시라도 기증 받는 사람 알게 되면, 멀리서라도 한 번 확인 해 줘

 

석율은 얼른 제 주변을 정리 했다. 큼, 매무새를 한 번 더 가다듬은 그가 살짝 긴장된 걸음으로 다시 납골당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 저어…, “

 

 

장그래, 절대 잊지 마. 죽더라도 이건 잊으면 안돼.

잊지 말고 기억해두었다가, 나 찾아 와.

그 때에는 내가 먼저 마음에 나무를 심어 둘게.

 

 

“…, 오, 오빠??! “

“ 서, 서연아?! 네가 여길 어떻게 “

“ 흐윽.., 그럼, 그래 오빠 였어요? “

“ 너.., 너 였어? 그래 눈…, “

 

 

응, 잊지 않을게. 죽더라도 이건 잊지 않을게.

멀리 가서도 늘 기억하다가, 꼭 너를 찾아갈게.

그 때에는 너의 뒤가 아닌 앞에서 마주 보며 살아 갈거야.

 

 

 

사랑해.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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