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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단편

[석율그래] 가족 모임


[석율X그래] 가족 모임 



부제 - You are not alone 



Written by. shp 








"그냥 나랑 같이 가자니까~" 


눈코뜰새 없이 바쁜 시간들이었다. 영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연말인줄도 모르고 지나갔을뻔 했을 정도로. 그렇다더라도, 연말이었다. 그리고 석율과 그래가 연인이 되어 처음, 함께 맞는 연말이기도 했다. 으례 다른 연인들처럼 어디 가까운 곳으로 1박 2일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야, 두사람 모두 굴뚝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원인터네셔널의 연말은 그 어느때보다 바빴고, 둘은 선택권 없이 회사에 남아야 하는 신입사원들이었다. 거창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이벤트라도 준비하고 싶어 우리도 백기씨처럼 스키장이라도 갈까? 하고 묻던 석율에게, 사실 어디 있어도 상관없지 않아요? 우리 둘이 같이 있는게 중요하지. 난 회사도, 집도. 어디든. 석율씨랑 있는게 중요한데. 그래는 말했다. 그 모습이 예뻐 한동안 그래를 품에 꼬옥 안았다. 내 예쁜 연인. 사실은, 어디든 가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이쁜 사람. 누가 보게 될까 아까웠다. 할 수만 있다면 꽁꽁 싸매 묶어두고 나만 보고 싶다. 석율은 품에 느껴오는 그래의 따스함을 느끼며 유치한 소유욕이 생기는 제 자신의 모습에 쿡, 웃어버렸다. 



그러던 두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서로의 부모님. 그래의 어머니는, 얼마 전 그래가 챙겨드린 용돈으로 동네 아주머니와 가까운 온천에 가기로 했다며 일부러 들를 필요 없다고 못을 박으셨다. 뭔가, 석율과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또 그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의도가 빤히 보이긴 했지만, 완강하게 말씀하시는 어머니께 그래는 못내, 알았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석율의 어머니는, 올해는 연말 가족모임에 꼭 참석 좀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 너 회사 들어가고 처음 맞는 연말이라 가족들 전부 다 오기로 하셨는데. 니가 안오면 어떡해. 


전화기 밖으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한 톤 높은 목소리를,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그래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다녀와요. 그가 저를 안심시키려는듯 웃어보인 입매가, 어쩐지 너무 애잔해보였다. 알았어요. 다시 전화드릴게. 석율은 일단 전화를 끊었다. 


"다녀와요. 가서, 이렇게나 멋진 아들이 되었다고 실컷 보여드리고 와요. 엄청 자랑스러워하실거야" 









"그래야, 좀 천천히 가" 


"카트 잘 끌고 와요. 바빠, 시간 없어요" 


종종거리며 걷는 그래의 걸음이 바쁘다. 그 뒷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석율은 그림을 감상하듯 따라 걷는다. 아이들 장난감 코너에서 눈을 크게 뜨고 이리저리 고심하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를 따스한 마음이 번져, 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그 모습을 담아 보았다. 


"이거! 하준이 좋아하겠다. 그쵸?" 


요즘 영유아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캐릭터 장난감 박스 하나를 골라 든 그래가, 카트를 한 손으로 잡고 선 석율에게 보이며 웃어보인다. 그럴걸? 하며 어깨를 으쓱, 해보인 석율이, 그래 곁에 다가간다. 


"니가 주면, 더 좋아할거 같은데. 진짜 같이 안갈거야?" 


대답 대신, 예쁘게 입꼬리를 올린 그래는, 얼른 카트에 제가 고른 장난감을 넣고 다시 바쁜걸음을 재촉한다. 장그래, 좀 천천히 가라니까. 넘어지겠어. 










= 저녁 먹었어요? 침대 옆에 선물들 뒀는데. 시간되면 카드도 좀 쓸거죠? - Yes♥ 


그래가 야근하는 밤, 그래가 몇가지 챙겨놓은 반찬들로 대충 저녁을 때운 석율이, 침실에서 그간 그래가 열심히 골라 사둔 선물 꾸러미들을 하나 둘 거실로 옮겨놓는다. 많기도 하다. 이건 또 언제 챙겼대. 석율과 함께 장을 보던 날에는 없었던 것 같은 소소한 선물들까지 빼곡하다. 하얀 봉지에 든, 카드 꾸러미를 든 석율이, 협탁 위에 올려둔 만년필을 가지고 거실로 나온다. 

핸드폰에서, 그간 세 누나들이 끊임없이 메세지로 보내주었던, 예쁜 조카들의 사진들을 찾아 본다. 성희, 지원이, 영호, 그리고 이제 막 말을 시작한 하준이까지. 평소에도 아이라면 껌뻑 죽는 그래는, 석율이 사진을 볼때마다 찰싹 붙어, 마치 화면속으로 빨려들어갈것처럼 이리보고 저리보곤 했었다. 같이 가서 보면 참 좋을텐데. 자신이 괜찮다 말해도, 그래가 무얼 망설이는지 알고있기에 더는 채근하지 못하던 석율이었다. 그래도..., 


"데려가고 싶다" 


카드를 펼친 석율이, 만년필의 뚜껑을 열어, 무엇을 써내려갈까 살짝 고민한다. 적지 않은 백지에, 마치 제 조카인냥 예뻐하고 고심하며 선물을 고르던 그래의 모습이 떠올라, 살풋, 웃음짓는다. 이내 석율은 결심한 듯 무언가 써내려간다. 그리고 카드를 봉투에 예쁘게 담아, 망설임 없이 적는다. '사랑하는 조카, 준이에게'. 언젠가 하준이가 글을 읽을때가 되면, 그래의 마음까지, 대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지이잉- 지이잉- 


석율의 핸드폰이 울린다. 그의 둘째 누나인, '석주누나'. 


"응 누나" 

-너 가족모임 온다고 했다며? 그래랑 같이 오는거야? 

"글쎄.... 고민이 많은가봐요. 계속 물어보긴 하는데, 안가겠다 그러네" 

-우리 식구들... 별로 상관 안하는거... 그래 몰라? 

"알아도 그게 그래 입장에서는 쉽지가 않은거니까. 온가족 함께 모이는 자리잖아요. 내가 그래 어머니 찾아뵙는거랑은 또 다른 문제고" 

-그럼 그날은 그래 뭐하는데? 

"그르게.... 안그래도 나도 마음 안좋아. 그래 어머니도 어디 다녀오시는거 같은데. 혼자 두기도 싫고" 

-뭐? 혼자있어? 한석율, 뭐하는거야. 잔말말고 그래 데려와. 알았지? 옛날에 한석율이 다 어디갔어, 뭘 그렇게 조심스러워. 데려와, 내가 책임질테니까. 그렇게 알고 끊는다? 


큭.... 역시 우리누나 참 거침이 없다. 그러게... 누나 동생이 참, 이상해지네. 이렇게까지 조심스럽던 사람이 아닌데.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그런거 참 확실한 사람이었는데. 그래를 만나고서부턴 내가, 그 아이가 받을 상처, 혹여라도 낮아질 자존심이 신경쓰여 자꾸만, 조심스러워지네. 그래도, 역시, 이렇게 혼자 두는건, 안될말이지..? 석율이 무언가 결심한 듯, 그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갑자기 무슨 쇼핑이에요" 

"글쎄 좀 따라 와봐~ 내가 너무 이쁜 옷 하나를 봤는데, 자기가 꼭 입어야 되겠더라구" 



석율이 저녁에 가족모임을 가기로 한 토요일 낮. 영문도 모른채 일어나 샤워를 마친 그래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끌고 데려온 석율이 도착한 곳은, 어느 백화점. 석율씨, 지금 이럴때가 아니라 가족모임 갈 준비를 해야죠. 손목을 붙잡힌채 종종종 따라가면서도 석율을 설득하는걸 그치지 않던 그래를 살포시 무시한채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가기만 하는 석율이었다. 그대로 어느 한 매장까지 딸려온 그래가, 그제야 석율의 의도를 알고 나 집에 옷 많아요- 하면서 돌아서려했지만, 뭐 찾으시는 상품 있으세요 손님? 하는 점원의 말에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아, 저기-" 

"이거요, 입어봐도 되죠?" 


그렇게 그대로 피팅룸으로 직행. 피팅룸 안에 들어가서도 미적대던 그래가, 밖에 선 석율의 목소리에 다시 나가려는 걸 멈췄다. 나, 문 앞에 지키고 서있다? 



"우와...... 역시, 내 안목이 좀 출중하긴 해" 


엄지를 척 들어보인 석율이 그 어느때보다 환히 웃는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얼굴이 이뻐 그런가 뭘 걸쳐놔도 이쁘네, 우리 그래. 저, 석율씨 이거..., 그래가 다시 제 옷으로 갈아입으려 하자, 석율이 그를 제지한다. 잠깐만. 그 위에 어울릴만한 겉옷도 금세 찾아온 석율이, 그래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재빨리 팔을 끼워넣고 입혀본다. 헐. 이건 더 이쁘네. 지금 뭐해요, 그래의 눈은 한없이 의문덩어리인데, 석율은 계속 싱글벙글. 여기요, 가위 있나요? 하며 가위까지 받아든 석율은 눈깜짝할 새 상표까지 떼어버렸다. 


"헉, 석율씨 이걸 떼면 어떡해요" 


그래는 놀라 토끼눈이 되었는데, 석율은 또 계산까지 마쳐버렸다. 이 사람 오늘 왜이래. 그래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 석율이 다시 다가와 옷을 잘 여미어준다. 그리고는 그래의 귀에만 들리도록 속삭인다. 



"나 짐이 너무 많아. 그러니까 같이 가자. 응?" 









정신을 차려보니 고속도로다. 정말 눈깜짝할새. 라는 말은 이럴때 쓰는구나. 그래는 걱정이 한가득인데, 운전대를 잡은 석율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려 한다. 허, 그 어이없는 모습에, 그래도 헛웃음이 난다. 


"혹시 니가 착각할까 해서 하는 말인데, 넌 내가 부탁해서 짐 들어주러 가는거야. 그니까 괜히 긴장할 필요가 없는거지, 우리 그래그래는"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눈이 다 휘어지도록 그래를 향해 웃어보이던, 근래 보기 드물었던 한석율의 장난기 어린 모습에, 그래도, 계속되던 멀뚱한 시선을 거둔다. 정말 못말려. 


"짐꾼한테 필요이상으로 투자가 너무 많네. 옷까지 사주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의 그래를 보며, 석율이 다시 웃는다. 당연하지, 나 원인터 섬유팀 한석율이야. 나와 동행하게 되면 그 누구든, 이뻐야지, 일단은. 안그래, 자기야? 






가고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일거다. 석율이 그래에게 잘할수록, 그리고 어머니께 잘할수록, 그래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고 싶었다. 오지랖인듯 보이지만, 타인에 대한 마음에 흐르는 사랑이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 그를 태어나게 하고, 그렇게 사랑으로 길러준 분들은 어떤 분들이실까 궁금하지 않은건 아니었다. 그의 작은누나를 뵈었을 때, 그 편견 없는 맑은 시선에, 어쩐지 그가 있었던 세상은 너무 따뜻했을거라고. 그래는 생각했다. 자신의 부모님도 그래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이 좋은 분들이셨지만, 상대적으로 차가운 세상에 있었을 그래는, 두려웠다. 나의 차가움이, 혹여나 그 따스한 세상에 독이 되면 어쩌지. 원인터를 벗어난 그만의 세상에서, 제가 혹시 어울리지 않음을 너무 절실하게 깨달을까봐, 그래는 그것이 두려웠다. 너무 죄송한 일이 생길까봐. 감히 그 따스함을 욕심내보고 싶어질까봐. 그것이..그래가 망설였던 이유였었다. 










"그래야.. 다왔어, 일어나자 이제" 


으음... 석율의 따스한 말에, 그래가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 잠이 덜깬 그래가 주위를 둘러보다 파륵, 놀란다. 미쳤어 장그래. 잠이 오냐. 


"미안.... 중간에 운전 바꿔주려고 했는데" 


얼굴에 한껏 미안한 표정을 올린 그래를 보며, 석율이 귀엽다는듯 웃는다. 네, 그 거짓말 믿을게요 장그래씨. 진짠데..., 크큭, 알았어. 얼른 내리자. 





"후우..." 

"하하... 떨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던 그래가, 저도 모르는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이 꼭, 언젠가 보았던 것 같아서, 석율은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 말로는, 수 많은 대국에서도 떨어본적이 없다던데. 장그래, 난 지금 니가 왜이렇게 귀엽니. 석율이 그런 그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그래가 장난스레, 난 짐꾼이라면서요. 안떨려요, 웃는다. 흐흐, 그래. 들어가자. 석율이 살짝, 그래의 손을 잡았다 놓는다. 










집이, 한석율을 닮았다. 그래는 석율과 선물을 한아름 안아들고 마당을 가로지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단층이지만 넓은 집. 벽돌색의 지붕과,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잘 어울리는. 곳곳에 그의 어린시절이 담겨있을 화단과, 작은 텃밭. 대저택은 아니었지만 그가 늘 아늑함을 느꼈을 공간이 보였다. 석율은 그런 그래를 끌어 제 곁에 두었다. 힘차게 문을 연 석율은 소리쳤다. 엄마! 아들왔어요. 


"안녕하세요. 장그래라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집안 가득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명절에나 느껴볼법한 기름냄새와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래의 인사에, 부엌에서 음식장만을 하시던 석율의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에 뭍은 물기를 닦으며 다가오셨다. 어서와요. 웃는 모습이 석율과 닮은, 어머니의 손이 참 따뜻했다. 


반가워요, 호탕하게 웃으시는 석율의 아버님 곁에, 아버님과 비슷하게 닮은 석율의 삼촌들이 계셨고. 그 옆으로 석주를 포함한 석율의 누나들과 매형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저를 쳐다보는, 사진으로 보았던 석율의 조카들이 보였다. 그야말로 대가족.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친척들과의 왕래가 거의 없었던 그래에게, 참 오랜만의 느껴보는 가족의 풍경이었다. 



"삼촌!!" 

"우와! 영호 엄청 컸네!?" 


석율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조카들에 둘러싸였다. 셋째 누님인 석영의 첫째, 영호는 하준이 태어나기 전, 유일한 남자조카였어서인지 유독 석율을 반겼다. 애기는 못봐도 애들하고 놀아주는건 엄청 잘한다더니 진짜였나보다. 


"짬-쭌" 

"그래야, 얘 좀 봐. 하준이가 너보더니 난리다" 

석율과 영호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래에게, 석주가 다가와 하준을 안겨줬다. 하준아. 그래가 안아주며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자지러질듯 까르르 웃어댔다. 유하준, 니 삼촌은 나라고 했잖아, 임마! 석율이 부러 삐진척 말해보았지만, 그래 품에 안긴 하준이 석율에겐 갈 기미가 없었다. 우리 공주님들, 삼촌한테 인사 안해? 수줍은듯 서 있던 첫째 누님, 석희의 딸아이들에게 석율이 따스하게 말하며 부르자, 그제야 쪼르르 달려와 폭 안기는 아이들. 성희 이제 완전 아가씨 같다. 지원이 더 이뻐졌는데? 제 삼촌의 말에 베시시 웃어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많이 들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석율의 어머니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는, 접시들을 그래쪽으로 밀어주며 이것저것 권해주셨다. 엄마, 아들 오랜만에 온거 안보여요? 석율이 말했고, 장모님. 저희도 있는데요. 석율의 매형들도 부러 장난스레 한마디씩 했지만, 그 말속엔 모두 따뜻한 온정이 있었다. 본 적 없는 크기의 밥상차림이었다. 자리가 모자라 아이들은 방에 저희끼리 먹도록 상을 따로 내주기까지 했지만, 그러고도 큰 상 세개를 붙여야 온가족이 겨우 앉았다. 



"그래라고 했나? 내 잔 한 잔 받지" 


석율의 아버님이 한 잔을 권하시고, 그를 필두로 석율의 삼촌들도 한 잔씩. 벌써 네 잔이나 받아 마신 그래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지만, 왠지 오늘같은 기분이면, 좀 취해도 좋겠다 싶다. 석율은 아예 술 병을 들고 다니며 삼촌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주거니 받거니를 시작했다. 그의 심성은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가 현장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이들 때문이리라. 술잔을 받아 고개를 돌려 마시던 그래의 눈에 현관 한켠에 놓아진 깨끗하지 않은 워커가 몇켤레 보였다. 그들의 전투화. 그래는 그들 사이에 섞인 석율과 그 신발들을 번갈아 보았다. 현장을 놀이터삼아 뛰어다니고 자재들을 장난감삼아 놀았을 그의 어린시절. 본 적이 없지만 꼭 보고 있는듯 필름처럼 지나가는 그 장면들이 눈에 선해, 그래가 웃어보인다. 어느새 그래의 옆자리로 돌아온 석율이, 밥상 밑으로 슬며시 그래의 손을 잡아본다. 










"우리 강아지들~~~ 이리 와봐" 



저녁상을 물리고 한켠에 놓아둔 선물을 거실에 모아둔 석율의 말에, 방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르르르 몰려 나온다. 큭, 정말 강아지들 같다. 내년에 초등학교를 들어간다던 성희는, 하준이를 조심스레 안고 나온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그래가 얼른 하준을 받아 안았다. 


"자 이건 성희랑 지원이꺼, 이건 영호꺼. 그리고 이건 하준이꺼" 


아이들의 고사리손에는 꽤 버거워보이는 상자들을 한아름 안겨주자, 그 예쁜 얼굴들에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맑은 미소가 크게 걸린다. 자 차렷, 하며 아이들을 일렬로 세운 석율이, 삼촌한테 인사. 하자, 일제히 삼촌 감사합니다-. 


"여기, 그래 삼촌이 이거 다 골라줬어. 그래 삼촌한테도, 인사" 


석율이 그래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하자, 아이들이 또다시, 삼촌 감사합니다- 인사한다. 예쁜 가정에서 예쁜 아이들이 나온다더니, 하나같이 안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없다. 그의 어린시절도, 이렇게 사랑이 가득했겠지. 


아이들은 장난감을 서로 가지고 놀고, 석율에게도 안기고 뒤엉키며 저마다의 애정표현을 하기에 바쁘다. 무리에서 잠시 빠져나온 성희가, 그래를 향해 발그레 해진 얼굴로 다가온다. 


"우리 삼촌, 친구에요?" 

아이의 예쁜 물음에, 응. 그래가 해사하게 웃으며 답하는데, 석율이 곁에 다가와 말한다. 삼촌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 


"그럼 삼촌도, 우리 삼촌 가족이에요?" 

"응?" 

아이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어 그래가 다시 되묻자, 

"엄마가 그랬어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족이 되는거라고. 근데 우리 삼촌이 삼촌을 사랑하면, 가족 아니에요?" 


그래는 대답 대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이 작은 아이를 품에 안아본다. 석율이 그래의 대답을 대신한다. 맞아 성희야, 그래 삼촌을 삼촌이 너무 사랑하니까, 가족이지. 우리 아가씨 다 컸네, 모르는게 없어. 아이의 작은 두손이, 그래의 목을 껴안는다. 그를 바라보는 석율의 얼굴에도 전에 없이 따뜻한 미소가 걸린다. 










"저..., 저도 좀 도울게요" 


아직 아이들에게 잡혀있는(?) 석율을 두고, 방을 빠져나온 그래가, 조심히 부엌으로 다가섰다. 한쪽에서는 누님들이 설겆이를 하는 중이고, 석율의 어머니는, 식사 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과일을 준비중이었다. 


"아휴, 아니에요. 손님인데. 가 앉아있어요" 

어머니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래를 말렸지만, 그래의 손에는 벌써 과일하나가 들려있다. 설거지를 마친 석주가, 그런 그래를 조용히 보다 나머지 누님들을 데리고 부엌을 나선다. 

"젊은 사람이, 손이 야무지네" 

"아, 저.. 말씀 놓으세요. 저 석율씨보다도 한살이 어립니다" 

차분히 과일을 깎는 그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왠지 모를 따스함이 어려있다. 그럴까요, 그럼? 



"우리 석율이가... 잘해줘?" 

"네?" 

아.... 회사에서 잘해주냐는 뜻이신건가. 별 뜻 없이 물어보신 말인것 같아, 네, 그럼요. 석율씨가 저희 동기들 중 분위기 메이커거든요. 둘러 답하는데, 어머니가 그게 아니라는 듯, 웃으신다. 


"집에서는? 속 썩이는 짓은 안하고?" 

넌지시 물으셨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 그래가,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고 고개가 숙여진다. 아실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물어오실줄은 몰랐다. 잘못한 일은 없지만, 왠지 잘못한 것 같아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래를 보던 어머니는, 그러지 말라며 손을 내젓고는 그래를 향해 다시 웃어 주신다. 



"우리 석주. 석율이만큼이나 말이 많잖아. 뭐, 그게 숨길일도 아니고. 하준이 봐준다 하던 날, 얘기하다 알았어." 

"죄송..합니다" 

"어이쿠, 그게 왜 그래가 미안할 일이야. 어떻게 여길지는 모르지만, 석율이 아빠나 나나, 우리 식구 별로 그런 것에 크게 편견이 없어요. 석율이 아버지나 삼촌들 직업상, 세상에서 주는 편견이 얼마나 많은데, 집에서까지 그러면 되나. 우리는 안아줘야지. 가족은 그런거잖아. 안그래?" 


그래는 그간, 석율이 제게 보여주었던 편견 없는 마음들의 근원을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구나. 세상의 찬바람이 끝없이 나를 옭아매와도, 언제나 쉴 수 있었던 곳에서. 석율이 그들을 위해 넥타이를 메겠다 결심하게 된 그 뒤에는, 이러한 어머니가, 아버지가, 삼촌들이, 누나들이 있었겠구나, 싶다. 감사합니다. 그래가 진심으로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런 그래의 손을, 어머니가 겹쳐 잡아오신다. 아까도 느꼈지만, 참 따뜻하고 정 많은 손이다. 


"우리 석율이가, 그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른다던데.. 그래도, 그렇게 불러봐줄래?" 

"....... 어머니" 


그 세글자를 내뱉는 순간, 그래는 알았다. 나는 이제, 세상에 어머니가 둘이 되었구나. 라고. 깎아진 과일을 내가려던 어머니와 그 뒤를 따르던 그래를, 어머니가 다시 돌아보시곤 무언가 생각난듯,  


"석주 말 아니었어도, 집에 데려온다는 말에 어느정도 알았어. 석율이 저녀석이 저래 보여도, 집에 데려온 사람은 그래 네가 처음인거, 알고 있었니?" 










"안 피곤해?" 

"피곤해도 볼래요" 


다른 식구들이 다 제 집으로 돌아간 밤, 석율의 방에 자리잡은 그래와 석율이 무언가를 가지고 실랑이 중이다. 석율의 어린시절 사진이 담겨있을법한 낡은 사진첩 하나. 어쩐지 보여주기를 꺼려하는 석율 때문에, 처음엔 별 마음이 없던 그래도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무슨 사진이 들어있길래. 


"세상에...." 

"아, 그만봐" 

여러장 넘길 필요도 없었다. 아기 때 사진이 들어있던 두어장쯤 넘기니 유치원 시절부터의 어린 석율이 나왔고, 그 뒤는 더 볼 필요도 없겠다 싶다. 아니 무슨 사진에, 


"여자가 없는게 없어. 누나가 셋인걸 제외하고도. 이거 다 다른 사람 맞죠?" 

"나 처음 소개할 때 잊었어? 여자 좋아한다니까" 

이런 사람이, 도대체 남자인 나를 어떻게 만나는거야. 그 자체가 너무 신기해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았단 듯, 석율이 웃으며, 

"그러게. 어쩌다 이런 그래그래 장그래한테 빠져서는, 안그래?" 하면서 그래를 품에 꼬옥 안는다. 


그러고보니 그의 향기가 이 집과 닮아있구나. 들어서면서부터 낯설지 않았던 건, 그를 닮은 공기가 있었기 때문인듯 했다. 그를 닮은 공기, 그가 닮은 사람들... 그래는 석율의 품에, 조금 더 깊게 머리를 묻어본다. 석율은 그런 그래를 가만히 토닥이다, 그의 얼굴을 들어 진득하게 입술을 누른다. 그를 닮은 공기가 가득한 이 곳에, 두 사람의 체향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공기를 만들어낸다. 

아, 근데 이 많은 여자들은 어쩌고 집엔 나만 데려왔어요? 뭐?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어머니가 그러시던데? 헐, 너 엄마랑 어디까지 얘기한거야. 










아직 이른 새벽, 석율의 품에서 자던 그래가 눈을 뜬다. 어제 장거리 운전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술도 그래보다 많이 마신 석율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만큼 잠이 들었다. 쪽, 그의 입술에 살짝 뽀뽀한 그래가 조심히 그의 품을 빠져나온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ㅡ아버님, 이라는 단어가 아직 입에 붙지 않아 살포시 중얼거려본다. 

"어, 그래 일찍 일어났구나. 잠자리는, 괜찮았고?" 

"네. 운동... 가세요?" 

"응" 


아, 네 그럼 다녀오세요. 그래가 다시 돌아서려다, 저ㅡ, 



"저도 같이 가면 안될까요, 아버..님?" 










후우- 
가벼운 약수터 산책로라시더니, 동네 뒷산이라기엔 꽤나 험곡이 있는 길이었다. 산길이라면 아르바이트때 이것저것 하면서 다닌적이 있어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가볍게 올라가는 석율의 아버지와는 달리, 몇번을 뒤쳐지다가 따라 올라왔다. 앞서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싶을만큼, 분위기가 묘하게 닮아있다. 



이른 새벽, 아직 사람이 많지 않은 약수터 옆 벤치에, 그래와 석율의 아버지가 나란히 앉았다. 약숫물을 한바가지 떠 시원하게 들이키시고는, 한바가지 또 시원하게 떠 그래에게 건네셨다. 잠시 스친 손끝에서도, 그가 말한 현장의 깊이가, 느껴졌다. 


"그래 아버님은..." 

"아. 저 열여덟살에, 돌아가셨어요.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는 말에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래를, 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고생이 많았겠네.., 아닙니다. 그래가 살짝 씁쓸한듯한 미소를 보인다. 


"우리 석율이가 막내로만 자라서. 난 현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많이 챙겨봐주지도 못했어. 어디가서 철없이 행동하는건 아닌가 걱정이 많았는데, 어제 그래랑 함께 들어오는 석율이를 보니. 더이상은 걱정 안해도 되겠다 싶었어" 

"사람이 워낙 좋아 오해를 살 때도 있긴 하지만, 자기 일에 있어서는 프로의식이 강한 사람이에요. 걱정, 안하셔도ㅡ" 

ㅡ됩니다, 라는 말은, 아버지의 그 사람좋은 웃음과 함께 나온 말에 묻혀버렸다. 


"그래에게도, 좋은 사람이지, 우리 석율이?" 

비슷한 질문을 묻던 어제의 어머니와, 그 모습이 참 많이도 닮아 있다고 그래는 생각했다. 
한참을 바라보다 이내, 네. 너무. 과분한... 사람입니다. 


그래. 그럼 됐어. 하며 그래의 어깨를 툭툭, 치던 아버지가, 


"난 옛날 사람이라, 다른 건 잘 모르지만. 그리 어렵게 생각할것도 없을 것 같더라고. 어제처럼, 우리 집에 아들 하나 더 생겼다 생각하기로... 나는 그러고 싶었어. 그러니, 돌아가신 아버님 대신, 남은 세월은 내가 그래 아버지 하면 어떨까?" 



아버지...... 잊고 살던 단어였다. 돌아가시고 처음 몇년은, 입에 올리면 나도 엄마도 너무 아팠으니까 억지로 꺼내지 않았고. 그 후에 몇년은, 사는게 퍽퍽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 그 말이 어색해 웅얼댄 그래를, 아버지는 다 이해한다는 듯 또 툭툭, 어깨를 치신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차마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말하는 그래에게, 



"가족끼리, 그런말은 하는거 아냐, 아들" 











"그래야 이거는, 장조림. 국물에 밥까지 비벼 먹으라고 일부러 간 세게 안했어. 남으면 국물에 계란이랑 해서 먹으면 되고... 아, 이거는 갓김치. 익었으니까 바로 먹기 시작해도 돼. 음, 이거는 ㅡ" 

"엄마. 그만 챙겨요. 그래랑 나, 둘다 집에서 밥 잘 못 먹어" 

"그래서 뒀다 먹어도 되는거로만 했어. 아들, 넌 가서 시동이나 걸어" 


챙겨주는 반찬통을 하나하나 열어 그래에게 확인시켜주는 어머니와 그런 모습을 흐뭇한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석율이, 결국엔 한마디를 던진다. 역시 지지 않으신 어머니는, 넌 빠지라며 웃으시기까지. 허, 도대체 우리집 식구들은 장그래를 보여주기만 하면 아들을 잊어. 부러 장난스레 툴툴 댄 석율이 어머니가 바리바리 챙긴 반찬통 중 일부를 챙겨 차로 향한다. 그런 석율을 보며 웃은 그래가, 어머니께 웃으며 말한다. 



"걱정 마세요, 제가 하나도 안남을때까지 챙겨서 먹게 할게요-" 

"석율이보다도, 그래 니가 좀 잘 먹어야겠다. 쟨 어릴때부터 워낙 어디가서 굶을 애는 아니었어. 이건 그래 니가 다 먹어야 한다, 응?" 


따스한 어머니의 말에, 네- 감사합니다. 하고 예쁘게 대답한 그래가 배웅을 나서려는 어머니와 함께 대문을 나선다. 





"갈게요 엄마, 가볼게요 아버지" 


석율이 부모님을 따스하게 안는다. 그 모습이, 마치 어제도 그제도 그랬던것처럼 자연스럽다. 조심히 올라가. 연락하고. 하시던 부모님이, 옆에서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그래에게도 손을 뻗으신다. 


"우리 막내아들도 좀 안아봐야지" 



그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부모님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담겨있다. 그 품에 편안하게 안긴 그래에게, 어젯밤 석율에게서 났던 그 좋은 향기가 맴돈다. 늘, 그래에게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던 석율의 마음은, 이렇게 전해진 것이었음이, 그 따스한 품안에서 깨달아진다. 사랑받고 있다는 건, 백번의 말이 가르쳐주는 주입식 교육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건, 그 단한번의 짧은 포옹에서부터도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석율은 사랑받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 사랑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듯 그래를 포함시켜 주었다. 










"안 데려왔음 어쩔뻔 했어, 그래 안그래 장그래?" 


따스함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래의 표정은, 아직도 한없이 설레이고 있다. 그런 그래를 흘끗 바라보던 석율이, 짐짓 장난스레 그에게 말한다. 



"고마워요" 


더 좋은 말, 더 벅찬 말로 말해주고 싶은데, 이럴 때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고마워요. 너무 많이 고마워요. 


그런 그래의 마음을 알아준 석율이, 그래의 한 손을 깍지 껴 잡는다. 그리고 그 손을 입으로 가져가 쪽, 하고 손등에 뽀뽀한다. 




알려주고 싶었다. 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인것을. 너의 이 온전한 마음을, 재계약이나, 정사원이라는 말로 다 정의 내릴 수 없음을. 회사가 아니어도, 너를 사랑해줄 사람들이 충분히 많으니, 더는 그 안에서 너무 아파하며 아등바등하지 않기를 바랬다. 기원에서 나오던 그 날의 너는 혼자였지만, 혹여 원인터에서 나오게 되더라도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그러니 그때만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석율은 몸소, 보여주고 싶었다. 



"차 좀 잠깐 세워봐요" 

"응? 왜ㅡ" 

"얼른," 



그래의 재촉에, 석율이 한 쪽에 차를 세운다. 안전벨트를 풀러낸 그래가, 급한 듯 깊게- 석율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쳐온다. 고맙다는 말은, 말로 하는게 아니라면서요. 언젠가 제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 그래가 예뻐, 석율이 두 손으로 그래의 볼을 감싸고, 기다리는듯 열린 그래의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 




우리가 이렇게 하나이듯이- 



넌 혼자가 아니야. 






그러니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자. 



You are not alone, 

fin.
[팬픽] [미생/석율X그래] 가족 모임

IP :  .82 l Date : 14-11-29 14:05 l Hit : 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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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율X그래] 가족 모임 



부제 - You are not alone 



Written by. shp 








"그냥 나랑 같이 가자니까~" 


눈코뜰새 없이 바쁜 시간들이었다. 영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연말인줄도 모르고 지나갔을뻔 했을 정도로. 그렇다더라도, 연말이었다. 그리고 석율과 그래가 연인이 되어 처음, 함께 맞는 연말이기도 했다. 으례 다른 연인들처럼 어디 가까운 곳으로 1박 2일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야, 두사람 모두 굴뚝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원인터네셔널의 연말은 그 어느때보다 바빴고, 둘은 선택권 없이 회사에 남아야 하는 신입사원들이었다. 거창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이벤트라도 준비하고 싶어 우리도 백기씨처럼 스키장이라도 갈까? 하고 묻던 석율에게, 사실 어디 있어도 상관없지 않아요? 우리 둘이 같이 있는게 중요하지. 난 회사도, 집도. 어디든. 석율씨랑 있는게 중요한데. 그래는 말했다. 그 모습이 예뻐 한동안 그래를 품에 꼬옥 안았다. 내 예쁜 연인. 사실은, 어디든 가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이쁜 사람. 누가 보게 될까 아까웠다. 할 수만 있다면 꽁꽁 싸매 묶어두고 나만 보고 싶다. 석율은 품에 느껴오는 그래의 따스함을 느끼며 유치한 소유욕이 생기는 제 자신의 모습에 쿡, 웃어버렸다. 



그러던 두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서로의 부모님. 그래의 어머니는, 얼마 전 그래가 챙겨드린 용돈으로 동네 아주머니와 가까운 온천에 가기로 했다며 일부러 들를 필요 없다고 못을 박으셨다. 뭔가, 석율과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또 그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의도가 빤히 보이긴 했지만, 완강하게 말씀하시는 어머니께 그래는 못내, 알았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석율의 어머니는, 올해는 연말 가족모임에 꼭 참석 좀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 너 회사 들어가고 처음 맞는 연말이라 가족들 전부 다 오기로 하셨는데. 니가 안오면 어떡해. 


전화기 밖으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한 톤 높은 목소리를,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그래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다녀와요. 그가 저를 안심시키려는듯 웃어보인 입매가, 어쩐지 너무 애잔해보였다. 알았어요. 다시 전화드릴게. 석율은 일단 전화를 끊었다. 


"다녀와요. 가서, 이렇게나 멋진 아들이 되었다고 실컷 보여드리고 와요. 엄청 자랑스러워하실거야" 









"그래야, 좀 천천히 가" 


"카트 잘 끌고 와요. 바빠, 시간 없어요" 


종종거리며 걷는 그래의 걸음이 바쁘다. 그 뒷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석율은 그림을 감상하듯 따라 걷는다. 아이들 장난감 코너에서 눈을 크게 뜨고 이리저리 고심하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를 따스한 마음이 번져, 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그 모습을 담아 보았다. 


"이거! 하준이 좋아하겠다. 그쵸?" 


요즘 영유아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캐릭터 장난감 박스 하나를 골라 든 그래가, 카트를 한 손으로 잡고 선 석율에게 보이며 웃어보인다. 그럴걸? 하며 어깨를 으쓱, 해보인 석율이, 그래 곁에 다가간다. 


"니가 주면, 더 좋아할거 같은데. 진짜 같이 안갈거야?" 


대답 대신, 예쁘게 입꼬리를 올린 그래는, 얼른 카트에 제가 고른 장난감을 넣고 다시 바쁜걸음을 재촉한다. 장그래, 좀 천천히 가라니까. 넘어지겠어. 










= 저녁 먹었어요? 침대 옆에 선물들 뒀는데. 시간되면 카드도 좀 쓸거죠? - Yes♥ 


그래가 야근하는 밤, 그래가 몇가지 챙겨놓은 반찬들로 대충 저녁을 때운 석율이, 침실에서 그간 그래가 열심히 골라 사둔 선물 꾸러미들을 하나 둘 거실로 옮겨놓는다. 많기도 하다. 이건 또 언제 챙겼대. 석율과 함께 장을 보던 날에는 없었던 것 같은 소소한 선물들까지 빼곡하다. 하얀 봉지에 든, 카드 꾸러미를 든 석율이, 협탁 위에 올려둔 만년필을 가지고 거실로 나온다. 

핸드폰에서, 그간 세 누나들이 끊임없이 메세지로 보내주었던, 예쁜 조카들의 사진들을 찾아 본다. 성희, 지원이, 영호, 그리고 이제 막 말을 시작한 하준이까지. 평소에도 아이라면 껌뻑 죽는 그래는, 석율이 사진을 볼때마다 찰싹 붙어, 마치 화면속으로 빨려들어갈것처럼 이리보고 저리보곤 했었다. 같이 가서 보면 참 좋을텐데. 자신이 괜찮다 말해도, 그래가 무얼 망설이는지 알고있기에 더는 채근하지 못하던 석율이었다. 그래도..., 


"데려가고 싶다" 


카드를 펼친 석율이, 만년필의 뚜껑을 열어, 무엇을 써내려갈까 살짝 고민한다. 적지 않은 백지에, 마치 제 조카인냥 예뻐하고 고심하며 선물을 고르던 그래의 모습이 떠올라, 살풋, 웃음짓는다. 이내 석율은 결심한 듯 무언가 써내려간다. 그리고 카드를 봉투에 예쁘게 담아, 망설임 없이 적는다. '사랑하는 조카, 준이에게'. 언젠가 하준이가 글을 읽을때가 되면, 그래의 마음까지, 대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지이잉- 지이잉- 


석율의 핸드폰이 울린다. 그의 둘째 누나인, '석주누나'. 


"응 누나" 

-너 가족모임 온다고 했다며? 그래랑 같이 오는거야? 

"글쎄.... 고민이 많은가봐요. 계속 물어보긴 하는데, 안가겠다 그러네" 

-우리 식구들... 별로 상관 안하는거... 그래 몰라? 

"알아도 그게 그래 입장에서는 쉽지가 않은거니까. 온가족 함께 모이는 자리잖아요. 내가 그래 어머니 찾아뵙는거랑은 또 다른 문제고" 

-그럼 그날은 그래 뭐하는데? 

"그르게.... 안그래도 나도 마음 안좋아. 그래 어머니도 어디 다녀오시는거 같은데. 혼자 두기도 싫고" 

-뭐? 혼자있어? 한석율, 뭐하는거야. 잔말말고 그래 데려와. 알았지? 옛날에 한석율이 다 어디갔어, 뭘 그렇게 조심스러워. 데려와, 내가 책임질테니까. 그렇게 알고 끊는다? 


큭.... 역시 우리누나 참 거침이 없다. 그러게... 누나 동생이 참, 이상해지네. 이렇게까지 조심스럽던 사람이 아닌데.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그런거 참 확실한 사람이었는데. 그래를 만나고서부턴 내가, 그 아이가 받을 상처, 혹여라도 낮아질 자존심이 신경쓰여 자꾸만, 조심스러워지네. 그래도, 역시, 이렇게 혼자 두는건, 안될말이지..? 석율이 무언가 결심한 듯, 그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갑자기 무슨 쇼핑이에요" 

"글쎄 좀 따라 와봐~ 내가 너무 이쁜 옷 하나를 봤는데, 자기가 꼭 입어야 되겠더라구" 



석율이 저녁에 가족모임을 가기로 한 토요일 낮. 영문도 모른채 일어나 샤워를 마친 그래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끌고 데려온 석율이 도착한 곳은, 어느 백화점. 석율씨, 지금 이럴때가 아니라 가족모임 갈 준비를 해야죠. 손목을 붙잡힌채 종종종 따라가면서도 석율을 설득하는걸 그치지 않던 그래를 살포시 무시한채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가기만 하는 석율이었다. 그대로 어느 한 매장까지 딸려온 그래가, 그제야 석율의 의도를 알고 나 집에 옷 많아요- 하면서 돌아서려했지만, 뭐 찾으시는 상품 있으세요 손님? 하는 점원의 말에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아, 저기-" 

"이거요, 입어봐도 되죠?" 


그렇게 그대로 피팅룸으로 직행. 피팅룸 안에 들어가서도 미적대던 그래가, 밖에 선 석율의 목소리에 다시 나가려는 걸 멈췄다. 나, 문 앞에 지키고 서있다? 



"우와...... 역시, 내 안목이 좀 출중하긴 해" 


엄지를 척 들어보인 석율이 그 어느때보다 환히 웃는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얼굴이 이뻐 그런가 뭘 걸쳐놔도 이쁘네, 우리 그래. 저, 석율씨 이거..., 그래가 다시 제 옷으로 갈아입으려 하자, 석율이 그를 제지한다. 잠깐만. 그 위에 어울릴만한 겉옷도 금세 찾아온 석율이, 그래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재빨리 팔을 끼워넣고 입혀본다. 헐. 이건 더 이쁘네. 지금 뭐해요, 그래의 눈은 한없이 의문덩어리인데, 석율은 계속 싱글벙글. 여기요, 가위 있나요? 하며 가위까지 받아든 석율은 눈깜짝할 새 상표까지 떼어버렸다. 


"헉, 석율씨 이걸 떼면 어떡해요" 


그래는 놀라 토끼눈이 되었는데, 석율은 또 계산까지 마쳐버렸다. 이 사람 오늘 왜이래. 그래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 석율이 다시 다가와 옷을 잘 여미어준다. 그리고는 그래의 귀에만 들리도록 속삭인다. 



"나 짐이 너무 많아. 그러니까 같이 가자. 응?" 









정신을 차려보니 고속도로다. 정말 눈깜짝할새. 라는 말은 이럴때 쓰는구나. 그래는 걱정이 한가득인데, 운전대를 잡은 석율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려 한다. 허, 그 어이없는 모습에, 그래도 헛웃음이 난다. 


"혹시 니가 착각할까 해서 하는 말인데, 넌 내가 부탁해서 짐 들어주러 가는거야. 그니까 괜히 긴장할 필요가 없는거지, 우리 그래그래는"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눈이 다 휘어지도록 그래를 향해 웃어보이던, 근래 보기 드물었던 한석율의 장난기 어린 모습에, 그래도, 계속되던 멀뚱한 시선을 거둔다. 정말 못말려. 


"짐꾼한테 필요이상으로 투자가 너무 많네. 옷까지 사주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의 그래를 보며, 석율이 다시 웃는다. 당연하지, 나 원인터 섬유팀 한석율이야. 나와 동행하게 되면 그 누구든, 이뻐야지, 일단은. 안그래, 자기야? 






가고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일거다. 석율이 그래에게 잘할수록, 그리고 어머니께 잘할수록, 그래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고 싶었다. 오지랖인듯 보이지만, 타인에 대한 마음에 흐르는 사랑이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 그를 태어나게 하고, 그렇게 사랑으로 길러준 분들은 어떤 분들이실까 궁금하지 않은건 아니었다. 그의 작은누나를 뵈었을 때, 그 편견 없는 맑은 시선에, 어쩐지 그가 있었던 세상은 너무 따뜻했을거라고. 그래는 생각했다. 자신의 부모님도 그래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이 좋은 분들이셨지만, 상대적으로 차가운 세상에 있었을 그래는, 두려웠다. 나의 차가움이, 혹여나 그 따스한 세상에 독이 되면 어쩌지. 원인터를 벗어난 그만의 세상에서, 제가 혹시 어울리지 않음을 너무 절실하게 깨달을까봐, 그래는 그것이 두려웠다. 너무 죄송한 일이 생길까봐. 감히 그 따스함을 욕심내보고 싶어질까봐. 그것이..그래가 망설였던 이유였었다. 










"그래야.. 다왔어, 일어나자 이제" 


으음... 석율의 따스한 말에, 그래가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 잠이 덜깬 그래가 주위를 둘러보다 파륵, 놀란다. 미쳤어 장그래. 잠이 오냐. 


"미안.... 중간에 운전 바꿔주려고 했는데" 


얼굴에 한껏 미안한 표정을 올린 그래를 보며, 석율이 귀엽다는듯 웃는다. 네, 그 거짓말 믿을게요 장그래씨. 진짠데..., 크큭, 알았어. 얼른 내리자. 





"후우..." 

"하하... 떨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던 그래가, 저도 모르는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이 꼭, 언젠가 보았던 것 같아서, 석율은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 말로는, 수 많은 대국에서도 떨어본적이 없다던데. 장그래, 난 지금 니가 왜이렇게 귀엽니. 석율이 그런 그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그래가 장난스레, 난 짐꾼이라면서요. 안떨려요, 웃는다. 흐흐, 그래. 들어가자. 석율이 살짝, 그래의 손을 잡았다 놓는다. 










집이, 한석율을 닮았다. 그래는 석율과 선물을 한아름 안아들고 마당을 가로지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단층이지만 넓은 집. 벽돌색의 지붕과,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잘 어울리는. 곳곳에 그의 어린시절이 담겨있을 화단과, 작은 텃밭. 대저택은 아니었지만 그가 늘 아늑함을 느꼈을 공간이 보였다. 석율은 그런 그래를 끌어 제 곁에 두었다. 힘차게 문을 연 석율은 소리쳤다. 엄마! 아들왔어요. 


"안녕하세요. 장그래라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집안 가득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명절에나 느껴볼법한 기름냄새와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래의 인사에, 부엌에서 음식장만을 하시던 석율의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에 뭍은 물기를 닦으며 다가오셨다. 어서와요. 웃는 모습이 석율과 닮은, 어머니의 손이 참 따뜻했다. 


반가워요, 호탕하게 웃으시는 석율의 아버님 곁에, 아버님과 비슷하게 닮은 석율의 삼촌들이 계셨고. 그 옆으로 석주를 포함한 석율의 누나들과 매형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저를 쳐다보는, 사진으로 보았던 석율의 조카들이 보였다. 그야말로 대가족.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친척들과의 왕래가 거의 없었던 그래에게, 참 오랜만의 느껴보는 가족의 풍경이었다. 



"삼촌!!" 

"우와! 영호 엄청 컸네!?" 


석율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조카들에 둘러싸였다. 셋째 누님인 석영의 첫째, 영호는 하준이 태어나기 전, 유일한 남자조카였어서인지 유독 석율을 반겼다. 애기는 못봐도 애들하고 놀아주는건 엄청 잘한다더니 진짜였나보다. 


"짬-쭌" 

"그래야, 얘 좀 봐. 하준이가 너보더니 난리다" 

석율과 영호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래에게, 석주가 다가와 하준을 안겨줬다. 하준아. 그래가 안아주며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자지러질듯 까르르 웃어댔다. 유하준, 니 삼촌은 나라고 했잖아, 임마! 석율이 부러 삐진척 말해보았지만, 그래 품에 안긴 하준이 석율에겐 갈 기미가 없었다. 우리 공주님들, 삼촌한테 인사 안해? 수줍은듯 서 있던 첫째 누님, 석희의 딸아이들에게 석율이 따스하게 말하며 부르자, 그제야 쪼르르 달려와 폭 안기는 아이들. 성희 이제 완전 아가씨 같다. 지원이 더 이뻐졌는데? 제 삼촌의 말에 베시시 웃어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많이 들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석율의 어머니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는, 접시들을 그래쪽으로 밀어주며 이것저것 권해주셨다. 엄마, 아들 오랜만에 온거 안보여요? 석율이 말했고, 장모님. 저희도 있는데요. 석율의 매형들도 부러 장난스레 한마디씩 했지만, 그 말속엔 모두 따뜻한 온정이 있었다. 본 적 없는 크기의 밥상차림이었다. 자리가 모자라 아이들은 방에 저희끼리 먹도록 상을 따로 내주기까지 했지만, 그러고도 큰 상 세개를 붙여야 온가족이 겨우 앉았다. 



"그래라고 했나? 내 잔 한 잔 받지" 


석율의 아버님이 한 잔을 권하시고, 그를 필두로 석율의 삼촌들도 한 잔씩. 벌써 네 잔이나 받아 마신 그래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지만, 왠지 오늘같은 기분이면, 좀 취해도 좋겠다 싶다. 석율은 아예 술 병을 들고 다니며 삼촌들과 아버지 사이에서 주거니 받거니를 시작했다. 그의 심성은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가 현장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이들 때문이리라. 술잔을 받아 고개를 돌려 마시던 그래의 눈에 현관 한켠에 놓아진 깨끗하지 않은 워커가 몇켤레 보였다. 그들의 전투화. 그래는 그들 사이에 섞인 석율과 그 신발들을 번갈아 보았다. 현장을 놀이터삼아 뛰어다니고 자재들을 장난감삼아 놀았을 그의 어린시절. 본 적이 없지만 꼭 보고 있는듯 필름처럼 지나가는 그 장면들이 눈에 선해, 그래가 웃어보인다. 어느새 그래의 옆자리로 돌아온 석율이, 밥상 밑으로 슬며시 그래의 손을 잡아본다. 










"우리 강아지들~~~ 이리 와봐" 



저녁상을 물리고 한켠에 놓아둔 선물을 거실에 모아둔 석율의 말에, 방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르르르 몰려 나온다. 큭, 정말 강아지들 같다. 내년에 초등학교를 들어간다던 성희는, 하준이를 조심스레 안고 나온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그래가 얼른 하준을 받아 안았다. 


"자 이건 성희랑 지원이꺼, 이건 영호꺼. 그리고 이건 하준이꺼" 


아이들의 고사리손에는 꽤 버거워보이는 상자들을 한아름 안겨주자, 그 예쁜 얼굴들에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맑은 미소가 크게 걸린다. 자 차렷, 하며 아이들을 일렬로 세운 석율이, 삼촌한테 인사. 하자, 일제히 삼촌 감사합니다-. 


"여기, 그래 삼촌이 이거 다 골라줬어. 그래 삼촌한테도, 인사" 


석율이 그래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하자, 아이들이 또다시, 삼촌 감사합니다- 인사한다. 예쁜 가정에서 예쁜 아이들이 나온다더니, 하나같이 안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없다. 그의 어린시절도, 이렇게 사랑이 가득했겠지. 


아이들은 장난감을 서로 가지고 놀고, 석율에게도 안기고 뒤엉키며 저마다의 애정표현을 하기에 바쁘다. 무리에서 잠시 빠져나온 성희가, 그래를 향해 발그레 해진 얼굴로 다가온다. 


"우리 삼촌, 친구에요?" 

아이의 예쁜 물음에, 응. 그래가 해사하게 웃으며 답하는데, 석율이 곁에 다가와 말한다. 삼촌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 


"그럼 삼촌도, 우리 삼촌 가족이에요?" 

"응?" 

아이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어 그래가 다시 되묻자, 

"엄마가 그랬어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족이 되는거라고. 근데 우리 삼촌이 삼촌을 사랑하면, 가족 아니에요?" 


그래는 대답 대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이 작은 아이를 품에 안아본다. 석율이 그래의 대답을 대신한다. 맞아 성희야, 그래 삼촌을 삼촌이 너무 사랑하니까, 가족이지. 우리 아가씨 다 컸네, 모르는게 없어. 아이의 작은 두손이, 그래의 목을 껴안는다. 그를 바라보는 석율의 얼굴에도 전에 없이 따뜻한 미소가 걸린다. 










"저..., 저도 좀 도울게요" 


아직 아이들에게 잡혀있는(?) 석율을 두고, 방을 빠져나온 그래가, 조심히 부엌으로 다가섰다. 한쪽에서는 누님들이 설겆이를 하는 중이고, 석율의 어머니는, 식사 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과일을 준비중이었다. 


"아휴, 아니에요. 손님인데. 가 앉아있어요" 

어머니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래를 말렸지만, 그래의 손에는 벌써 과일하나가 들려있다. 설거지를 마친 석주가, 그런 그래를 조용히 보다 나머지 누님들을 데리고 부엌을 나선다. 

"젊은 사람이, 손이 야무지네" 

"아, 저.. 말씀 놓으세요. 저 석율씨보다도 한살이 어립니다" 

차분히 과일을 깎는 그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왠지 모를 따스함이 어려있다. 그럴까요, 그럼? 



"우리 석율이가... 잘해줘?" 

"네?" 

아.... 회사에서 잘해주냐는 뜻이신건가. 별 뜻 없이 물어보신 말인것 같아, 네, 그럼요. 석율씨가 저희 동기들 중 분위기 메이커거든요. 둘러 답하는데, 어머니가 그게 아니라는 듯, 웃으신다. 


"집에서는? 속 썩이는 짓은 안하고?" 

넌지시 물으셨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 그래가,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고 고개가 숙여진다. 아실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물어오실줄은 몰랐다. 잘못한 일은 없지만, 왠지 잘못한 것 같아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래를 보던 어머니는, 그러지 말라며 손을 내젓고는 그래를 향해 다시 웃어 주신다. 



"우리 석주. 석율이만큼이나 말이 많잖아. 뭐, 그게 숨길일도 아니고. 하준이 봐준다 하던 날, 얘기하다 알았어." 

"죄송..합니다" 

"어이쿠, 그게 왜 그래가 미안할 일이야. 어떻게 여길지는 모르지만, 석율이 아빠나 나나, 우리 식구 별로 그런 것에 크게 편견이 없어요. 석율이 아버지나 삼촌들 직업상, 세상에서 주는 편견이 얼마나 많은데, 집에서까지 그러면 되나. 우리는 안아줘야지. 가족은 그런거잖아. 안그래?" 


그래는 그간, 석율이 제게 보여주었던 편견 없는 마음들의 근원을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구나. 세상의 찬바람이 끝없이 나를 옭아매와도, 언제나 쉴 수 있었던 곳에서. 석율이 그들을 위해 넥타이를 메겠다 결심하게 된 그 뒤에는, 이러한 어머니가, 아버지가, 삼촌들이, 누나들이 있었겠구나, 싶다. 감사합니다. 그래가 진심으로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런 그래의 손을, 어머니가 겹쳐 잡아오신다. 아까도 느꼈지만, 참 따뜻하고 정 많은 손이다. 


"우리 석율이가, 그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른다던데.. 그래도, 그렇게 불러봐줄래?" 

"....... 어머니" 


그 세글자를 내뱉는 순간, 그래는 알았다. 나는 이제, 세상에 어머니가 둘이 되었구나. 라고. 깎아진 과일을 내가려던 어머니와 그 뒤를 따르던 그래를, 어머니가 다시 돌아보시곤 무언가 생각난듯,  


"석주 말 아니었어도, 집에 데려온다는 말에 어느정도 알았어. 석율이 저녀석이 저래 보여도, 집에 데려온 사람은 그래 네가 처음인거, 알고 있었니?" 










"안 피곤해?" 

"피곤해도 볼래요" 


다른 식구들이 다 제 집으로 돌아간 밤, 석율의 방에 자리잡은 그래와 석율이 무언가를 가지고 실랑이 중이다. 석율의 어린시절 사진이 담겨있을법한 낡은 사진첩 하나. 어쩐지 보여주기를 꺼려하는 석율 때문에, 처음엔 별 마음이 없던 그래도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무슨 사진이 들어있길래. 


"세상에...." 

"아, 그만봐" 

여러장 넘길 필요도 없었다. 아기 때 사진이 들어있던 두어장쯤 넘기니 유치원 시절부터의 어린 석율이 나왔고, 그 뒤는 더 볼 필요도 없겠다 싶다. 아니 무슨 사진에, 


"여자가 없는게 없어. 누나가 셋인걸 제외하고도. 이거 다 다른 사람 맞죠?" 

"나 처음 소개할 때 잊었어? 여자 좋아한다니까" 

이런 사람이, 도대체 남자인 나를 어떻게 만나는거야. 그 자체가 너무 신기해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았단 듯, 석율이 웃으며, 

"그러게. 어쩌다 이런 그래그래 장그래한테 빠져서는, 안그래?" 하면서 그래를 품에 꼬옥 안는다. 


그러고보니 그의 향기가 이 집과 닮아있구나. 들어서면서부터 낯설지 않았던 건, 그를 닮은 공기가 있었기 때문인듯 했다. 그를 닮은 공기, 그가 닮은 사람들... 그래는 석율의 품에, 조금 더 깊게 머리를 묻어본다. 석율은 그런 그래를 가만히 토닥이다, 그의 얼굴을 들어 진득하게 입술을 누른다. 그를 닮은 공기가 가득한 이 곳에, 두 사람의 체향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공기를 만들어낸다. 

아, 근데 이 많은 여자들은 어쩌고 집엔 나만 데려왔어요? 뭐?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어머니가 그러시던데? 헐, 너 엄마랑 어디까지 얘기한거야. 










아직 이른 새벽, 석율의 품에서 자던 그래가 눈을 뜬다. 어제 장거리 운전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술도 그래보다 많이 마신 석율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만큼 잠이 들었다. 쪽, 그의 입술에 살짝 뽀뽀한 그래가 조심히 그의 품을 빠져나온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ㅡ아버님, 이라는 단어가 아직 입에 붙지 않아 살포시 중얼거려본다. 

"어, 그래 일찍 일어났구나. 잠자리는, 괜찮았고?" 

"네. 운동... 가세요?" 

"응" 


아, 네 그럼 다녀오세요. 그래가 다시 돌아서려다, 저ㅡ, 



"저도 같이 가면 안될까요, 아버..님?" 










후우- 
가벼운 약수터 산책로라시더니, 동네 뒷산이라기엔 꽤나 험곡이 있는 길이었다. 산길이라면 아르바이트때 이것저것 하면서 다닌적이 있어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가볍게 올라가는 석율의 아버지와는 달리, 몇번을 뒤쳐지다가 따라 올라왔다. 앞서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싶을만큼, 분위기가 묘하게 닮아있다. 



이른 새벽, 아직 사람이 많지 않은 약수터 옆 벤치에, 그래와 석율의 아버지가 나란히 앉았다. 약숫물을 한바가지 떠 시원하게 들이키시고는, 한바가지 또 시원하게 떠 그래에게 건네셨다. 잠시 스친 손끝에서도, 그가 말한 현장의 깊이가, 느껴졌다. 


"그래 아버님은..." 

"아. 저 열여덟살에, 돌아가셨어요.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는 말에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래를, 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고생이 많았겠네.., 아닙니다. 그래가 살짝 씁쓸한듯한 미소를 보인다. 


"우리 석율이가 막내로만 자라서. 난 현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많이 챙겨봐주지도 못했어. 어디가서 철없이 행동하는건 아닌가 걱정이 많았는데, 어제 그래랑 함께 들어오는 석율이를 보니. 더이상은 걱정 안해도 되겠다 싶었어" 

"사람이 워낙 좋아 오해를 살 때도 있긴 하지만, 자기 일에 있어서는 프로의식이 강한 사람이에요. 걱정, 안하셔도ㅡ" 

ㅡ됩니다, 라는 말은, 아버지의 그 사람좋은 웃음과 함께 나온 말에 묻혀버렸다. 


"그래에게도, 좋은 사람이지, 우리 석율이?" 

비슷한 질문을 묻던 어제의 어머니와, 그 모습이 참 많이도 닮아 있다고 그래는 생각했다. 
한참을 바라보다 이내, 네. 너무. 과분한... 사람입니다. 


그래. 그럼 됐어. 하며 그래의 어깨를 툭툭, 치던 아버지가, 


"난 옛날 사람이라, 다른 건 잘 모르지만. 그리 어렵게 생각할것도 없을 것 같더라고. 어제처럼, 우리 집에 아들 하나 더 생겼다 생각하기로... 나는 그러고 싶었어. 그러니, 돌아가신 아버님 대신, 남은 세월은 내가 그래 아버지 하면 어떨까?" 



아버지...... 잊고 살던 단어였다. 돌아가시고 처음 몇년은, 입에 올리면 나도 엄마도 너무 아팠으니까 억지로 꺼내지 않았고. 그 후에 몇년은, 사는게 퍽퍽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 그 말이 어색해 웅얼댄 그래를, 아버지는 다 이해한다는 듯 또 툭툭, 어깨를 치신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차마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말하는 그래에게, 



"가족끼리, 그런말은 하는거 아냐, 아들" 











"그래야 이거는, 장조림. 국물에 밥까지 비벼 먹으라고 일부러 간 세게 안했어. 남으면 국물에 계란이랑 해서 먹으면 되고... 아, 이거는 갓김치. 익었으니까 바로 먹기 시작해도 돼. 음, 이거는 ㅡ" 

"엄마. 그만 챙겨요. 그래랑 나, 둘다 집에서 밥 잘 못 먹어" 

"그래서 뒀다 먹어도 되는거로만 했어. 아들, 넌 가서 시동이나 걸어" 


챙겨주는 반찬통을 하나하나 열어 그래에게 확인시켜주는 어머니와 그런 모습을 흐뭇한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석율이, 결국엔 한마디를 던진다. 역시 지지 않으신 어머니는, 넌 빠지라며 웃으시기까지. 허, 도대체 우리집 식구들은 장그래를 보여주기만 하면 아들을 잊어. 부러 장난스레 툴툴 댄 석율이 어머니가 바리바리 챙긴 반찬통 중 일부를 챙겨 차로 향한다. 그런 석율을 보며 웃은 그래가, 어머니께 웃으며 말한다. 



"걱정 마세요, 제가 하나도 안남을때까지 챙겨서 먹게 할게요-" 

"석율이보다도, 그래 니가 좀 잘 먹어야겠다. 쟨 어릴때부터 워낙 어디가서 굶을 애는 아니었어. 이건 그래 니가 다 먹어야 한다, 응?" 


따스한 어머니의 말에, 네- 감사합니다. 하고 예쁘게 대답한 그래가 배웅을 나서려는 어머니와 함께 대문을 나선다. 





"갈게요 엄마, 가볼게요 아버지" 


석율이 부모님을 따스하게 안는다. 그 모습이, 마치 어제도 그제도 그랬던것처럼 자연스럽다. 조심히 올라가. 연락하고. 하시던 부모님이, 옆에서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그래에게도 손을 뻗으신다. 


"우리 막내아들도 좀 안아봐야지" 



그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부모님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담겨있다. 그 품에 편안하게 안긴 그래에게, 어젯밤 석율에게서 났던 그 좋은 향기가 맴돈다. 늘, 그래에게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던 석율의 마음은, 이렇게 전해진 것이었음이, 그 따스한 품안에서 깨달아진다. 사랑받고 있다는 건, 백번의 말이 가르쳐주는 주입식 교육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건, 그 단한번의 짧은 포옹에서부터도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석율은 사랑받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 사랑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듯 그래를 포함시켜 주었다. 










"안 데려왔음 어쩔뻔 했어, 그래 안그래 장그래?" 


따스함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래의 표정은, 아직도 한없이 설레이고 있다. 그런 그래를 흘끗 바라보던 석율이, 짐짓 장난스레 그에게 말한다. 



"고마워요" 


더 좋은 말, 더 벅찬 말로 말해주고 싶은데, 이럴 때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고마워요. 너무 많이 고마워요. 


그런 그래의 마음을 알아준 석율이, 그래의 한 손을 깍지 껴 잡는다. 그리고 그 손을 입으로 가져가 쪽, 하고 손등에 뽀뽀한다. 




알려주고 싶었다. 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인것을. 너의 이 온전한 마음을, 재계약이나, 정사원이라는 말로 다 정의 내릴 수 없음을. 회사가 아니어도, 너를 사랑해줄 사람들이 충분히 많으니, 더는 그 안에서 너무 아파하며 아등바등하지 않기를 바랬다. 기원에서 나오던 그 날의 너는 혼자였지만, 혹여 원인터에서 나오게 되더라도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그러니 그때만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석율은 몸소, 보여주고 싶었다. 



"차 좀 잠깐 세워봐요" 

"응? 왜ㅡ" 

"얼른," 



그래의 재촉에, 석율이 한 쪽에 차를 세운다. 안전벨트를 풀러낸 그래가, 급한 듯 깊게- 석율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쳐온다. 고맙다는 말은, 말로 하는게 아니라면서요. 언젠가 제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 그래가 예뻐, 석율이 두 손으로 그래의 볼을 감싸고, 기다리는듯 열린 그래의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 




우리가 이렇게 하나이듯이- 



넌 혼자가 아니야. 






그러니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자. 



You are not alone,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