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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JOY

JOY - 02

[석율X그래] JOY - 2 


부제 - 우리 


Written by. shp 















*미래물 & 임신물 & 현실성 없음 주의* 
*배경 - 5년 후 (장그래 대리 & 한석율 대리)* 





그러니까 그 일은, 

기적, 이라고 밖에는. 








삑 삑 삑 삑- 띠리링-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조심스레 부축한 그래를 먼저 들여보낸 석율이 곧 뒤이어 집 안으로 들어온다. 미지근한 물 한잔을 그래에게 건네 마시게 한 뒤 그를 침대 위에 앉혀 놓고 겉옷도, 넥타이도 벗겨 내 준 뒤 제 옷들도 벗어내는데 그런 석율의 동선을 그래의 시선이 놓치지 않고 따라간다. 무언가 할말이 있는듯 조그마한 입술이 달싹거리다 이내 멈추기를 여러번. 곧 후우- 하는 심호흡과 함께 그래의 여린 목소리가 공기중에 울린다. 


"석율씨.... 나..." 


"ㅡ일단, 일단 좀 눕자 그래야... 나중에... 응? 자고 나서..."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제지당한 그래가 석율의 흔들리는 눈빛 앞에 할말을 잃는다. 응. 알았어요. 들릴듯 말듯 대답한 그래가 곧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색색, 누운지 몇 분 되지 않아 석율의 부드러운 토닥임에 다시금 잠이 들어버린 그래를 확인한 그가, 다시 이불을 잘 덮어준 뒤 1층으로 내려와 냉장고를 열어 맥주 캔 하나를 꺼내 딴 뒤에, 망설임 없이 입으로 가져다 댄다. 




"크으..." 


알싸한 맥주의 탄산이 목을 넘어가자 그제야 좀 정신이 드는 듯 불 꺼진 식탁 의자에 조용히 앉아본다. 후우-. 그의 깊은 한숨이 무거운 공기가 되어 집 안에 내려 앉는다. 









"장..그래씨께서... 임신을.... 하신것 같습니다." 


분명 한국말이었는데 알아들을수가 없다. 뭘.... 해요? 생각없이 흘러나간 그래의 질문에 의사는 다시 한 번 확인을 시켜준다. 
-임신이요. 4주차에 접어드신 듯 하네요. 


혹시 몰라 내과, 비뇨기과 쪽 검사도 다 해봤는데. 임신이 확실합니다. 의사는 제 쪽으로 돌려졌던 모니터에 빨간 펜으로 어딘가를 둥글게 표시하더니 설명한다. 


"여기, 이 부분이 아기집이에요. 그 안에 작은 점처럼 보이는 게 태아구요." 


ㅡ아이가, 집을 잘 지었네요. 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얼빠진 표정으로 단어 하나하나씩을 이해해 나가던 그래와 석율을 보던 '산부인과' 의사 주한은, 그럼, 이제 제 진료실로 옮겨갈까요. 묻는다. 







"그.. 저.. 선생님. 제가.... 아니, 저는... 남자..,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주한의 진료실로 옮겨 오고 나서도 한동안 말이 없던 두 사람의 침묵이, 결국 그래의 한마디에 의해 깨어진다. 더듬더듬. -그게 가능할리가... 가능할 수가.. 없잖습니까. 단어들만이 난무한 그 문장을 용케도 주한이 알아듣고는, 여러가지 프린트물과 책자를 그래와 석율 앞에 놓아준다. 영어들이 마구 써있기도 하고 더러는 영어인지 뭔지 모를 단어들도 섞여있지만, man, pregnancy, male, 하는 이런 단어들과 사진으로 미루어 보건데 세계 곳곳에 남자의 임신이 있었던 경우를 말하는 것일테지. 석율이 유심히 몇 장을 들고 읽어내려가다 다시 주한을 쳐다보는데 어느새 당혹감이 사라진 주한의 눈빛은 설명을 계속 해나간다. 


"확실히 드문 케이스이긴 한데, 아예 없는 사례는 아닙니다. 한국에는 알려진 바 없지만, 외국에서는 이미 열 달이 넘어 출산에 이른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다시 주춤해진 주한의 행동에, 또렷이 그의 입술만을 주시하며 이해해 나가려 노력하던 두 사람의 표정이 다시금 굳어버린다. 다만... 뭐요...., 


"다만, 이 분들은 인공적으로 자궁을 만들어냈거나, 원래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경우라 가능했던 일인데..., 장그래씨의 경우.. 자연적 임신이 된 케이스라, 그 점이.., 저희도 설명드리기가 애매합니다. 아까 과거의 수술 경험이나 어떤 병력, 가족력, 혹은 출생에 대해 혹여 모르셨던 부분이 있는지 물었던 것도 그 때문이구요" 


"... 아뇨...... 제가 아는 한은..... 없..어요" 


"네. 그래서 저희도 이 케이스에 대해서 좀 더 연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으로썬 그 어떤것도 명확하게 말씀드릴수가 없는 점..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음.., 우선 태아는 잘 자리 잡았어요. 아기집도 잘 생겨났고, 주수에 비해 좀 작은편이긴 하지만 태아도 무리 없이 잘 있네요. 하지만 워낙 모체에서 임신을 유지하는 호르몬을 만들어내는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걸로 보여요. 그래서..," 



주한은 또다시 말을 멈추고 제 옆자리에 있던 까만색 박스를 두 사람 앞에 놓아준다. 석율이 이게 뭐냐는 듯 박스를 열었고, 그 안에 주사기와 약물이 들어있는 작은 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다. 



"ㅡ호르몬 투여가 불가피 해 보입니다. 개월수가 넘어가면서 태아의 성장속도와 모체의 반응 속도에 따라 지속 여부는 결정 할거구요. 우선은 하루 세 번씩, 용량에 맞춰 투약 하셔야 해요. 자가 투약, 해보신 적 있으세요?" 


도리도리. -아니요. 그래가 말하자, 주한이 잠시 후에 밖에 나가면 간호사가 가르쳐 줄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약물 반응이 일어나 열이 좀 날 수 있어요. 그래도 40도 넘어가는건 위험하니까 그럴땐 꼭 연락주셔야 하구요... 어지럼증은 호르몬 변화 뿐만 아니라 급작스런 철분 수치 저하로 인해 그랬을겁니다. 좀 전에 맞으신 수액에 철분 주사가 같이 들어가 있었구요. 앞으로는 무조건 잘 드시고 잘 쉬셔야 해요. 혹시 입덧 증상은...?" 


"아직 잘.... 별다른 증상 못느꼈어요" 


주한의 말을 이해해 나가던 그래가 어느샌가 흔들리는 눈빛이 사라진다. 또렷한 시선의 그가 주한을 주시하자 그제야 주한이 희미하게 웃어보인다. 입덧 곧 시작할텐데... 엄마가 건강해야 하는거, 알죠? 그리고는 재차 굳어있는 석율에게도, 아빠가 많이 도와주셔야 하구요. 란다. 


"원래는 한달에 한 번씩 정기 검진인데, 그래씨는 유산의 위험도 있고 여러모로 주의가 필요한 케이스라, 당분간은 2주마다 한 번씩 오셔서 검진 받고 가세요. 아빠 되실..분도 함께 오시면 좋습니다. 모든 검진과정과 치료과정은, 기록이 될거구요. 저희 병원에서도 최대한, 이 케이스에 대해서 많이 연구하고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할테니, 우선 마음부터 편히 가지세요.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딱히 연륜이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그 하얀가운과 푸근한 웃는 인상이 주는 왠지 모를 믿음에, 어안이 벙벙했던 그래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이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퍼즐을 끼워맞추듯 납득이 되기 시작한다. -더, 궁금하신 사항은...? 이라던 주한의 물음에 -아뇨...아직은.., 하고 대답한 그래가 자가투약을 배우러 나가려는데, 그 때까지도 어딘가 굳어있던 석율이 드디어 입을 연다. 선생님, 잠시만요.., 

"네. 말씀하세요" 

"... 그래는..., 그러니까.. 산모..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는거죠...? 호르몬 주사 다 맞고, 보통의 엄마들처럼 그렇게, 열 달 잘 채우면, 출산은.. 아무 무리없이, 가능한겁니까.." 

ㅡ그러니까 아이..말고, 그래는요. 그 말씀은 안하셨잖습니까. 석율의 물음에, 잠시 아무말 없이 그와 시선을 교환하던 주한이.. 흘끗, 아직 진료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리에 선 그래를 본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후우, 작게 숨을 내쉰 그가 석율을 또렷이 보며 말한다. 


"... 지금은 아무것도, 장담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저 산모도, 아이도, 무탈하게 모든걸 잘 받아들여주길 바랄 뿐입니다. 저희가 지금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이구요" 

"마..., 만약에.., 만약에 못.. 못 받아들이면요," 


장그래씨가 임신을 하신것 같습니다, 라는 말에도 그래보다는 떨지 않았던 석율이었다. 하지만 -못받아들이면, 그땐 그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라고 묻는 그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 떨고 있었다. 그런 석율을 가만히 보던 의사가 그에게서 단 한 순간의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간다. 확답해 줄수는 없으나 한치의 거짓도 없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한석율씨..라고 하셨죠? 의사로써 이런 말씀, 참 무책임하게 들릴 것이라는거 저희도 잘 압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저희도 어쩌지 못하는 신의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는 거에요. 지금 장그래씨의 임신 자체가 기적같은 일이고 그건 신의 영역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이 전개될지는, 제 입으로 감히 말씀 드릴 수 없는 사항입니다. 죄송합니다" 


낯빛이 흙빛이 된다는건,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는건 이런걸까. 지금 석율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헌데, 조용히 그의 뒤에서 모든 말을 경청하던 그래는, -감사합니다 선생님. 또 뵐게요. 라며 꾸벅 인사하더니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문을 나선다.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꼐 고개를 두어번 좌우로 흔들어보인 주한이 조용히 석율에게 말한다. ㅡ엄마는, 벌써 준비가 되었나봅니다.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오늘 길었던 그 하루가 마치 꿈인 듯 흘러가는 가운데, 그래는 이상하리만큼 태연하고 덤덤했다. 제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라던 물음에 답을 받은 이후, 그래는 쭉, 그 표정이었다는걸 석율은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더더욱, 그의 입을 통해 나올 그 말이.. 두려웠다. 


".... 벌 인가...." 


석율은 중얼거리며 바지 뒷주머니에, 조심스레 꽂혀있던 사진 한장을 꺼내어 본다. -저기 아버님, 이거.. 초음파 사진인데요. 산모수첩, 이라는 것을 그래에게 챙겨주던 간호사가 돌아서던 석율에게 미처 건네지 못한 초음파 사진 한장을 내밀었었다. 

콩알..아니 그보다 작은 이 점이, 지금 그래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얘긴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그 현실 아닌 듯한 현실에 석율이 또다시 씁쓸하게 큭, 웃어보인다. 



욕심내지 않았었다면, 그건 거짓말일테다. 그래가 제 조카들을 저보다 예뻐할 때, 지나가던 유모차에 어김없이 두 사람의 시선이 함께 머물 때, 친구 녀석의 아이 돌잔치에 갔을 때, 아니.. 매일.. 까만 밤, 영롱하게 빛나던 그래의 두 눈동자르 볼 때마다... 그의 눈을 닮은 아이가 그의 품에 안겨 저를 보고 웃어주는 상상. 천국보다 행복한 상상. 했었더랬다. 


- ... 지금은 아무것도, 장담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상상이 무엇이었건간에, 이런 걸 원하는 건 아니었었다. 평생 마음 한 구석의 저도 모를 스산함을 안고 살 지언정, 그래가 조금이라도 위험한건, 있어서도, 아니 있을 수도 없는 상상이었는데. 석율의 시선이 그 작은 사진 한 장에 한 번, 그리고 침실에 곤히 잠들어있을 그래에게 한 번, 번갈아 닿는다. 긴 밤이 참, 아프다. 










위이잉- 위이잉- 


고요한 아침을 깨우는 부산한 소리에 석율이 눈을 뜬다. 옆을 살펴보니 침대 한 쪽은 이미 정리를 마친 듯 깨끗하다. 커피의 원두를 갈아내는 소리도, 커피를 내리는 소리도, 토스트를 구워내는 소리도 아닌 생소한 소음에 놀란 석율이 얼른 2층을 내려가보는데, 


"아.., 잘 잤어요?" 


해사한 미소의 그래가, 각종 야채들과 과일을 넣어 주스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쨌거나 병원에서의 치료가 효과가 있었는지, 어제보다는 한결 혈색이 나아진듯한 그래의 모습에, 석율이 그제야 옅게 웃으며 다가가 그래를 조심히 안아본다. 



"몸은," 

"괜찮아요. 어지러운 것도 사라지고" 



ㅡ다행이네. 말하던 석율이 그래의 뒤에 놓인 노란 고무줄의 토니캣과 이미 쓰임을 다한 주사기, 그리고 약물이 들어있던 병을 본다. -혼자 괜찮았는지, 아프진 않았는지.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석율은 애써 그 질문들을 삼켜버린다. 그런 그를 느낀 그래가, 어젯밤처럼 또, 석율씨.. 불러보는데, 석율이, 나 씻고 나올게. 하며 욕실로 사라져버린다. 그래의 시선이, 다시 석율의 뒷모습에 가 닿는다. 





아침부터 현장에 가봐야 하는 석율은 회사 정문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그래를 내려주려 차를 세웠다. 오는 내내, 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래는 쉽사리 내리지 못하고 머뭇대는데, 석율이 선수를 친다. 



"나 점심엔 돌아오는데, 뭐 먹을래? 뭐 좀 사올까?" 

".. 석율씨..." 

"ㅡ삼계탕, 먹을래? 어제 너 그거 먹이려다가, 병원..가는 바람에" 

"...한석율씨ㅡ" 

"뭐 먹고싶은지, 생각해 놔 그럼. 문자 보내도 좋고" 



의도적으로 그래의 부름을 피한다는 걸 절대 모를리 없는 그래가, 차 문을 열고 내리면서 툭, 감정 없이 말을 던진다. 



"... 난, 낳을거에요.



석율의 차가, 한동안 출발하지 못한다. 











"성훈씨 좋은 아침~" 

"대리님! 어제보다 훨씬 얼굴 좋아보이시네요? 몸 괜찮으신거죠?" 

"응, 그럼. 고마워... 과장님은 아직이시지?" 

"과장님 여기있다~" 

"아, 오셨어요" 


성훈과 그래가 아침인사를 나누고 때마침 김과장님이 사무실에 들어오시는, 일상적인 영업3팀의 아침이 밝았다. -과장님, 어제 바이어랑..., 김과장님께 보고서와 함꼐 간단한 브리핑을 시작하는 그래의 모습도, 여느때와 다름이 없다. 



"네 여보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원인터 영업3팀 장그래입니다. 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하하, 네.. 그.. 저희가 이번에 맡고 있는....ㅡ" 


한창 거래처와 통화를 하는 그래의 곁에, -대리님, 작게 부르며 내민 성훈의 손에, 커피 한잔이 들려 있다. -아, 잠시 난처한 표정이었던 그래가, 곧 전화 너머 상대와의 대화를 이어나가며, 고맙다는 눈짓으로 책상에 두라는 말을 대신한다. 



통화를 마치고, 물끄러미 성훈이 놓고 간 커피를 보던 그래가, 아무도 모르게 픽, 웃어보인다. 코 끝에, 어제 맡았던 물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맴돈다. ㅡ그래서였구나, 네가 있어서. 티나지 않게 아랫배 쪽에 살짝 손을 댄 그래는, 곧 예쁘게 웃어보이며 책상 위 한켠에 있던 서류를 집어든다. 








"아," 


회사 화장실 안쪽 칸에서, 변기에 걸터 앉은 그래가 주머니에 숨겨 온 토니캣과 주사기, 그리고 새 약병을 꺼내든다. 아침보다 훨씬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토니캣을 제 팔에 묶고 탁탁, 혈관이 도드라지게 보이자 준비해 둔 -약물이 든- 주사기를 망설임 없이 찔러넣는다. 그 따끔함에 살짝 찡그리며 신음한 그가, 다시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비닐팩에 다 쓴 토니캣과 주사기, 약병을 넣는다. ㅡ나 누가보면, 약 하는 줄 아는거 아냐? 스스로 묻고도 어이없음에 슬쩍 실소를 띈 그래가 일어나 나가려는 듯 제 옷을 툭툭 턴다. 문을 나서려던 그래는 멈칫. 제 허리에 매어진 허리띠를 보곤, 뭔가 생각하다 그것을 좀 느슨하게 한 칸 앞으로 채워둔다. 




[미안. 현장에 일이 많아져서. 백기씨한테 부탁해 놨어. 그 차 타고 집에 가. 집에서 보자 - 석율] 


결국 석율은 점심 시간에도, 또 퇴근시간이 넘어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달랑 문자 한 줄에 너무 많은 말이 숨겨져 있음을 모르지 않기에, 쉬이 액정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래가 곧, '그럴 필요 없어요. 택시 타고 갈게' 라고 타이핑 하려는데, 똑똑, 제 파티션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돌아보자 백기가 어설프게 웃으며 서 있다. -장대리님, 퇴근하시죠.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가는 길인데요 뭐. 집에 일찍 가봤자 할 일도 없고" 


아, 강과장님 출장 가셨지. 백기의 안경 너머에 못내 숨기지 못하는 그리움을 읽어낸 그래가 그저 빤히 보다 옅게 웃는다. 백기씨나 나나, 사랑이 참, 쉽지 않네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네?" 

"석율씨랑요. 나한테 부탁한다고 전화하는데, 전화 목소리가, 좀 가라앉아 있었어서" 


아.. 백기의 의문에 쉬이 대답할 수 없는 그래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떨군다. -그냥, 좀. 아파요. 



"아파요? 어디가요? 아니 아픈 사람이 그렇게 현장에 오래 있어도 되나?" 


백기는 그래도 되냐며 묻는데, 그래가 대답 대신 또 다시 그저 씁쓸하게 웃는다. 내가 마음을 아프게 한거라, 아마.. 일하는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거에요. 










"ㅡ예, 안녕하세요 저 원인터 자원팀 안영이 대리입니다. 아, 다름이 아니라 보내주신 서류에서 자료하나가 누락된거 같아서요. 네, 네에, 감사합니다" 

"바빠?" 

"아, 깜짝이야. 한대리님, 퇴근 안했어요?" 


늦게까지 야근하며 겨우 마지막 통화를 끝내고 있던 영이가, 소리소문 없이 다가와 제 파티션에 기대 선 석율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자동적으로 영업 3팀에 고개가 돌아가는데, 불이 꺼져 있자 의아한 듯 묻는다. 


"하과장님은?" 

"내일 아침에 조찬 회의가 있어서요. 먼저 갔어요" 

"아.." 


웃고 있지만 어딘가 어두운 것 같은 석율의 표정이 신경쓰인 영이가, 제 맞은 편 의자를 빼내어주며 -앉으세요. 하자 석율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내면서 책상 위에 주욱 늘어놓는다. 응? 이게 다 뭐.., 궁금한 듯 쳐다만 보고 선 영이에게 석율은 망설임없이 말한다. 


"러시아어, 영어, 둘 다 되지? 어느거부터 봐줄래?" 

"에?" 


왠 뜬금없이 외국어 얘긴가 싶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석율이 펼쳐 놓은 서류들을 대충 훑어가던 영이가, 놀라 석율을 한 번, 서류를 한 번, 빠르게 번갈아본다. 하지만 아랑곳 않는 석율은, 본래 제 목적이었던 듯한 말을 뱉는다. -아무거나, 아무 수치나. 그냥 되는대로 다. 말해줘. 


"한...한대리님," 

"묻지는 말고" 



그의 단호한 어조에 멍하니 바라보다 후우- 한숨을 내 쉰 영이가 다시 서류를 바라보고, 석율도 그 중 몇개를 골라 꼼꼼하게 읽어내려가기 시작한다. Male Pregnancy, Pregnant Man, Possibility, Natural Pregnancy, Case Story. 이런 단어들이 대다수의 문장을 이루고 있는 아티클들. 그들을 읽어내려가던 영이가 흘끔, 곁에 앉은 석율을 보는데.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심각할 수 있었나 싶어 새삼 놀랍다. 보다못한 그녀가 서류를 다시 책상 위에 원래대로 두고는, 



"한대리님.." 

"... 묻지 말랬잖아..." 


안 물어도, 지금 당신 표정이 다 말하거든요? 


"한대리님..." 

"....." 

"석율씨" 

"........." 

"오라버니" 


그제야, 석율이 고개를 들어 영이와 시선을 맞춘다. 그렇게 말 없이 빤히 보다, 영이가 미소지으며 말한다. -술 한잔 하러가요, 여동생이 살테니까. 








챙- 

두 개의 술잔이 부딪히기가 무섭게 훅, 입으로 전부 털어넣어버리는 석율을 보던 영이가,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조금 입에 대기만 하고 다시 내려놓는다. 석율은 제 손으로 다시 잔을 채우고 두번째도 망설임 없이 툭, 털어넣는다. 그것이 세번째에 반복되려하자 영이가, 급하게 병을 빼앗아든다. ㅡ천천히 좀. 저 아직 한 잔도 안비웠어요. 



"... 왜 안 놀래... 가끔보면 안대리는 이상한데서 침착해..." 

ㅡ꼭, 누구처럼. 석율이 말을 삼키자, 영이가 피식, 하고 웃는다. 



"나까지 놀라면, 석율씨 오늘 집에 가다가 땅으로 꺼져버릴 것 같아서요" 

"큭... 그런가.. 

안 믿기지... 믿기지가 않으니까 놀랄수도 없더라. 꿈인것 같아서 자꾸 꼬집었더니 뺨이 얼얼해" 

".... 병원.. 가 본거에요?" 

"어제. 쓰러졌었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의료진이 왔다갔다 하는걸 처음봤어. 근데 참, 말은 다 쉽더라. 이해도 다 안됐는데, 그냥 그게 현실이라고 그러더라" 

"장대리..., 아니 그래씨는요..." 

"뭐랬을꺼 같애...?" 



석율의 자조섞인 웃음이 영이에게도 아프게 와 닿는다.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이었다. 그의 표정이, 이미 모든걸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영이는 아까 석율이 보여주었던 기사와 학술지들의 내용들을 곱씹어본다. 그 어디에도, 그 어떤 단어도, 긍정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예스맨은, 이번에도 No를 말하지 않았을거고. 그래서 저를 찾아왔을 것이다. 번역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을테니까. 석율에게 필요한 건, 숫자나 퍼센트가 아니라,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대해 그저 담담하게 들어줄 사람이었을테다. 앞에 앉은 석율은, 대답을 들으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 술잔을 또다시 털어넣으며 말을 잇는다. 



"봐서 알잖아. 위험하대. 장담을 못한대. 근데 그녀석이.....," 


- 난, 낳을거에요. 


다 끝마치지 못한 석율의 문장은, 대신 하아- 하는 긴 한숨이 되어 흘러나온다. 근데 그녀석이, 낳겠다고.. 하겠다고.. 내 앞에서, 그렇게, 엄청 단단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 









"나 왔어...." 

자신을 기다리다 잠든 듯, 꽤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잠이 든 그래의 곁에 다가간 석율이,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말한다. 석율이 베개를 다시 잘 놓아주고 자리를 다시 잡아주자 불편함에서 벗어난 그래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아... 이렇게 애 같은 사람이, 도대체 뭘 하겠다고. 그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석율이, 꽤 오랜시간,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들지 못하고 그의 머리맡을 지킨다.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그래를 태운 석율의 차가 어딘가로 열심히 향한다. -갈 데가 있어. 짧은 한마디에 그래를 차에 태운 석율은, 요 며칠간의 모습처럼 또다시 입술이 꾹 붙어 한마디도 않은 채 앞만 보며 운전을 한다. 전에 없이 굳은 그의 표정에 차마, 어디가냐 물어볼 생각도 못한 그래는 계속 눈치만 살피는데,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 듯한 차가, 멈춰 섰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래가, 곧 뭔가 발견하고 의아한 듯, 


"여기가 어디..., 아.. 석율씨 병원은..., 2주에 한 번만 가면 된다고...ㅡ" 

석율씨가 잘못 들었나봐요, 나 오늘 검진일 아니에요, 하며 말하려는데 석율이 차마 그래를 보지 못하고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고 있다. 



"ㅡ!!" 

".... 두 시, 예약이야. 들어가자" 


누가 봐도 당황한 표정으로 그 말 뜻을, 정말이지 이해하기 싫은 그 말을 이해해버린 그래가, 뒤도 안돌아보고 차에서 내려 반대방향으로 향하자, 다급하게 차에서 내린 석율이 성큼 뛰어가 그래를 붙잡는다. 그래야,! 석율이 그를 돌려 세우는데, 차갑게 식어버린 그래의 눈에 순식간에 물기가 차오른다. 



"미쳤어 당신. 돌았어." 

"그래야,!" 

"놔요, 이거." 

"못 놔" 


놓으라고 낮은 어조로 말하는 그래가 석율의 손을 뿌리치려 하는데, 석율이 힘으로 그를 제압해버린다. 석율이 괴로운듯, 간절한 어조로 운을 뗀다. 


"우리.... 이런거 생각한 적 없었잖아, 5년도 넘는 시간동안 우리, 둘이서 잘 지냈잖아. 내가, 내가 더 잘할게. 내가, 앞으로 더 ㅡ" 

"ㅡ어떻게, 어떻게 이래! 제정신이에요? 이거 놔요!" 

"장그래!" 

"미친거야! 어떻게 되버린거야 당신! 이게, 어떻게,! 내가 지금, 왜...!" 

"그럼 어떡해!! 어? 니가 말해봐 그럼! 못들었어?! 위험하다잖아! 관련 기사를 수백개도 더 찾아봤어, 뒤지고 뒤져도 없어! 지금 이게 고집 부릴 일이 아니잖아!" 


네가 아프면, 혹여라도 너를, 잃으면, 차마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두려워 입술에 피가 다 나도록 꾹 삼킨 석율이, 그래를 움켜잡은 손이 덜덜 떨려오는걸 느낀다. 어느새 석율의 눈가에도 아픈 물기가 방울방울 맺힌다. 




"....... 그런데도...... 왔잖아요...." 

"ㅡ!!" 



석율의 그런 눈빛과 마주한 그래가 어느새 후두둑 눈물을 떨구면서, 힘겹게 소리를 낸다. 그래의 그 한마디에 무너져내리듯 눈빛이 흔들리는 석율을 바라보며, 그래가 채 가다듬지도 못한 호흡으로 말을 잇는다. 



"그렇게.... 전혀, 아무 가능성이 없는데도.... 왔잖아.... 이.. 아이가... 우리한테..... 흐윽.....흑..." 



차마 아무말도, 무슨 말도 내뱉을 수가 없어 그런 그래를 바라보고 선 석율도 어느샌가 울고, 있다. 이제는 기운도 없는듯, 잡힌 어깨에 힘이 다 빠져버린 그래가, 그렇게 소리내어 울면서도 석율의 팔을 떨리는 손으로 잡는다. 


"나.... 잘할게.... 잘할 수 있어요... 흐윽, 절대, 절대 잘못되는 일 없게.., 아이도, 흑, 나도..., 우리 다... ㅡ!!" 



그 말을 끝으로 주저 앉아 버리려는 그래를, 석율이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와락 안아버린다. 이젠 그의 품 안에서, 끄윽, 흑, 흑, 그래가 오열하듯 무너진다. 그 순간에도 꼭 해야 할 말인듯, 벌개져 버린 석율과 눈을 맞춘 그래가 속삭인다. 





그러니까........ 날 지켜줘요....... 

나랑...... 아이랑..... 

우리......, 




두 사람의 아픈 듯 따스한 눈빛이, 입술이, 오롯이 서로에게 가 닿는다. 







Yes, 

Welcome Home, B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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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외전+보너스가 있는 연재물입니다.
오메가버스 설정이 아닌 그저 '순수 임신물'입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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